눈처럼 흰 몸에 우아하고 커다란 귀, 겁먹은 듯한 눈, 오물거리는 작은 입. 외양으로 보건대 토끼는 연약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애완용으로도 많이 기릅니다. 그러나 토끼,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설화나 민화에 호랑이 다음으로 출연하는 게 토끼인데, 호암미술관 소장품인 민화에 보면 호랑이에게 대드는 얼룩 토끼가 나옵니다. 가회박물관의 그림에는 위협하는 호랑이에게 놀라 도망치는 토끼가 아니라, '흥! 내가 힘으로는 안 되니 일단은 물러나지만 두고 보자'하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호랑이를 꼬나보며 슬슬 뒷걸음질치는 토끼가 그려져 있습니다. 양반이나 지배자에게 굴복하지 않는 민초들의 저항심리가 토끼에게 투사된 거겠지요.
토끼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서 토끼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낙랑지역의 유물인데, 왕근묘(王根墓)로도 불리는 석암리 219호 석실에서 출토된 칠전통(漆箭筒)에 두꺼비와 함께 원형 은판에 새겨진 옥토끼라고 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중국이나 평양 일대의 고분에서는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고 있는 모습으로도 등장합니다. 이렇듯 토끼는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달에 존재하는 신비롭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토끼는 다산과 다복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토끼를 뜻하는 묘(卯)를 진서(晉書)의 악지(樂志)는 '2월은 묘이며, 묘는 무성함이다. 양기의 생을 받아서 번성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성장과 번창을 희구하는 농경사회에서 토끼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토끼는 정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왕성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양에서는 토끼는 '플레이보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토끼는 정력이 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력이 강한 동물로 설화나 민담에 등장합니다. '토끼전'의 토끼는 약한 존재이나, 사지(死地)에서도 용왕에게 사기를 치는 간 큰 토끼입니다. 중병이 든 용왕이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토끼의 간을 구하고자 충신인 자라를 보내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옵니다. 토끼의 몸을 갈라 간을 꺼내려 하자, 귀중품인 간을 청산녹수 맑은 물에 씻어 바위 밑에 감추어 두었는데, 자기를 육지로 잠시만 보내 주면 얼른 갖고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순발력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 기민하고 민첩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롤 모델을 제시해준다고 할까요.
이렇게 예민한 안테나 같은 적응력을 갖고 있는 토끼는 기술관료주의 문명을 비판한 버질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도 등장합니다. '옛날에는 잠수함 속에 흰 토끼를 태우고 다녔다. 흰 토끼는 산소가 많고 적음에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다. 그래서 잠수함 속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사람보다 7시간 먼저 죽는다.' 그런데 게오르규는 소설 속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트라이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난 요즈음 웬일인지 잠수함을 탔을 때처럼 숨이 가빠서 미칠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문학 작품에도 이 '잠수함 토끼'처럼 인간 사회의 폭력과 모순뿐 아니라 인류가 다른 생물과 생태계에 가하는 폭력에까지도 민감한, 윤리적 감수성을 가진 토끼가 등장합니다. 바로 김남일의 풍자소설 〈천재토끼 차상문〉의 토끼 영장류 차상문입니다. 작가는 아이큐 200이 넘는 '레푸스 사피엔스'를 내세워 자본주의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토끼보다 더 빨리 달려가는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일침을, 아니 똥침을 먹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토끼인간 차상문은 우리 근현대사와 사회, 문화, 인간의 존재 이유와 인류의 존재방식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근심 어린 절망과 환멸의 '토'를 답니다.
토끼는 날쌔게 잘 달립니다. 그러나 21세기,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토끼보다 더 미친 듯 달립니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토끼는 잠시 여유를 부리며 낮잠을 잡니다만, 인간은 누군가가 스톱워치를 누를 때까지 잠시도 쉬지 못하고 달립니다. 아니 우화가 아닌 현실의 세계는 무한경쟁의 세계입니다. 그 시계를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현대 사회의 비극이 있다고나 할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는 늘 "바쁘다 바빠"를 외치면서도 자신이 회중시계를 갖고 달리는데 말이죠. 그 이상한 토끼는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데리고 갑니다.
신묘년(辛卯年) 토끼해가 밝았습니다. 자!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이제 신묘년(辛卯年)의 토끼가 우리를 신묘(神妙)한 세계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다양성을 가진 토끼의 캐릭터답게 건강하고, 번성하며, 창조하며, 다복하며, 영리하고 민첩하게 열심히 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인생은 마라톤. 속도 조절도 하며 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