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부산의 한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치어 사망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승용차 운전자 한모(48)씨가 범행 3일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뒤따르던 다른 차에 설치된 '차량용 블랙박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고 장면이 고스란히 블랙박스에 녹화된 것이다. 블랙박스 동영상으로 뺑소니 차를 찾아낸 경찰은 "목격자가 없어 블랙박스가 아니었다면 범인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초 운전자 김모(34)씨는 서울 도심의 한 교차로에서 "신호 위반을 했다"며 교통 법규 위반 스티커를 발부하려는 경찰관에게 블랙박스 동영상을 보여줘 무죄를 입증했다. 김씨는 "분명히 파란 불에 출발했는데 경찰관이 믿지 않아 경찰서로 가서 동영상을 확인했다"며 "경찰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 블랙박스 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운전자들 사이에 차량용 블랙박스 열풍이 불고 있다. 차량용 블랙박스는 차의 전방·후방·측면 상황을 자동 녹화해 저장하고 차량 속도, 주행거리, 브레이크 작동 여부 같은 운행 데이터를 기록하는 장치다.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장군카오디오 김승현(45) 대표는 "최근 새 차 사는 사람의 절반 이상은 블랙박스를 설치한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현재 30만대 정도가 블랙박스를 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 1765만대의 1.7% 정도지만 작년 중반 이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팔린 차량용 블랙박스는 13만대로 재작년의 5만대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운전자들이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이유는 교통사고가 나도 상대방과 입씨름을 벌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제3의 목격자'인 블랙박스에 사고 상황이 그대로 찍혀 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를 설치한 차에는 보험료를 3%까지 할인해주는 '블랙박스 보험 할인제도'도 한 원인이다. 블랙박스를 설치하면 사고를 사정(査定)하는 데 드는 비용이 줄기 때문에 보험사들이 2009년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차량용 블랙박스는 카메라 설치 위치에 따라 차의 앞, 뒤, 측면을 모두 찍을 수 있다. 해상도에 따라 3~6m 앞의 차 번호판을 식별할 수 있다. 가격은 카메라 수와 메모리 용량에 따라 10만~100만원대로 다양하다.
이유 없이 차량이 손상되는 경우에도 블랙박스가 요긴하게 쓰인다. 사업가 이모(50)씨는 주차해둔 고급 외제 차량 문에 자꾸 뾰족한 물체로 긁힌 자국이 생기자 지난달 블랙박스를 설치했다. 이씨는 "수리비가 1000만원이 나온 적도 있다"며 "더는 당할 수 없어서 블랙박스를 달았다"고 말했다.
법인 차량의 경우 회사가 '직원 감시용'으로 블랙박스를 다는 경우도 있다. 직원들이 회사 차를 사적인 용도로 썼는지 등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한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한 중소기업에서 차량 12대에 블랙박스를 전부 설치한 적이 있다"며 "연료비 절감을 위해 회사 차원에서 블랙박스를 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차량용 블랙박스는 '감시 카메라'로 악용되면서 부작용도 생긴다. 최모(24)씨는 최근 남자 친구와 길거리에서 애정을 나누는 모습이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 곤욕을 치렀다. 인근에 주차한 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동영상을 운전자가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유튜브측에 요청해 동영상을 간신히 내렸지만 이미 얼굴이 고스란히 나온 동영상을 수만명이 보고 난 뒤였다.
블랙박스에 기록되는 동영상 때문에 운전자들이 스스로 올바른 교통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인터넷 블랙박스 동호회는 지난해 말부터 블랙박스에 찍힌 교통 법규 위반 동영상을 경찰에 신고하고 있다. 이 동호회 운영자 한계진(34)씨는 "차량용 블랙박스는 일부 부작용이 있지만 잘만 활용하면 '도로 위의 감시자'로서 순기능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