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춘 前 지검장

한화태광그룹 사건을 수사하다 검찰을 떠난 남기춘(南基春·51·사진) 전(前) 서울서부지검장의 회한(悔恨)은 깊었다. "살아있는 대통령을 수사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재벌은 교묘하게 수사를 방해했고, 법무부도 우리를 지치게 했다." 2004년 대선자금 사건의 주임검사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파헤쳤던 사건보다 이번 수사가 힘들었다고 했다. 유달리 많은 정권 실세들과 맞닥뜨리면서도 타협하지 않아 '강골(强骨)' '검객(劍客)'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남검(南檢)'이었다. 그는 한화 임원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모두 기각되고 '과잉수사'라는 지적이 제기되던 지난달 28일 사표를 던졌다. 야인(野人)이 되어 충북 제천의 수도원으로 피정(避靜)을 다녀온 그를 15일 만났다. 설산(雪山)에서 지내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수염은 덥수룩했다. 이귀남 법무장관이 수사에 불법 개입했다는 논란이 불거지기 전이었다.

―왜 사표를 냈나?

"영장 기각되자 검찰에 비판이 제기됐다. 지휘관이 자리에 연연할 수 있나. 외길이었다."

―영장이 기각되던 밤(1월 24일), 수사검사를 모두 불러 밤새 통음(痛飮)했다고 들었다. 그때 마음을 굳힌 것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수사도 거의 마무리 됐고, 작년 9월 수사 시작하면서 놓았던 술잔까지 다시 들었으니…."

―문책성 인사를 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런 소문 들었다. 수사권 없는 대검 형사부장 같은 자리로 전보시킨다고 하더라."

―수사가 힘들었다고 했다. 어떤 점이 그런가.

"한화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잘못된 여론을 조장했고, 언론 플레이에 능했다. 예를 들어 차명계좌가 많이 나와 명의자들 모두 불러 확인해야 했다. 기본 아닌가. 소환한 300명 대부분이 바로 계좌 명의자들이었다. 멀쩡히 일하는 회사 간부들 오라 가라 하면서 기업 괴롭힌 게 아니었다. 조사 안 하면 그게 부실수사가 되는 것이고, 봐주기 수사가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한화는 수사 때문에 기업이 곧 무너질 것처럼 여기저기 로비하고 다니는 것 같더라."

―청와대나 정치권 외압은?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연락받은 적 없다. 요즘은 검사에게 전화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법무부를 통해 들어온다."

―법무부가 (수사) 간섭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어떻게 간섭했단 말인가?

"…."

―검찰총장도 한화 수사를 말렸나.

"이번 수사하면서 총장 뜻을 거스르거나 마찰을 빚은 적은 한차례도 없었다."

―과잉수사라는 지적도 있다.

"뭐가 과잉수사인가. 태광의 경우 고전적 수법을 사용했다. 빼돌려 놓은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큰 피해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화는 달랐다. 위장 계열사와 차명계좌를 이용해 사주 일가가 수천억원을 맘대로 써버린 사건이다."

―그래도 영장은 기각되었지 않나.

"법원 권한이라 말하지 않겠다. 관련자들 재판에 넘겼으니 성공한 수사인지 잘못된 수사인지는 그 결과를 통해 나올 거다. 수사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에 대한 섭섭한 감정도 감추지 않았던데.

"수사 내용과 거리가 먼 한화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하니까 그랬던 거다. 일부 언론은 노골적으로 비판하더라.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최근 회의에서 '장비는 쓰러지고 제갈량은 떠나는 형국'이라며 착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장비는 사퇴한 남기춘을, 제갈량은 서울고검장으로 이동한 차동민 전 대검차장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남기춘이 한 사건에 대해 '과잉 수사' '거친 수사'라는 반응은 있지만 최소한 '봐주기 수사' '면피 수사'라는 지적은 받은 적이 없었다.

―검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력은 수사의지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하더라. 그만큼 의지와 열정이 중요하다. 검사는 정의실현을 위해 존재한다. 바른 자세, 그거 없으면 타협하고 무너지게 된다."

―수사가 거칠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 다만 전(前) 정권 때부터 실세들을 많이 수사하다 보니 나에게 불만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표를 내자 후배 검사 200여명이 내부통신망에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다고 들었다. 무슨 말을 전하고 싶나.

"무슨 말을 하겠나. 잘하라는 것밖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검찰 수사 의지가 더욱 꺾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나 같은 후배 검사는 많다. 그런데 요즘 검찰총장 지시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곳이 많다고 한다. 인사권도 없다. 왜 총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나. 검찰이 그렇게 돼선 안 된다."

―개업은?

"몇군데서 연락 오는데, 당분간 쉬고 싶다"

한화 사건은 어차피 남기춘에겐 25년 검사 생활의 마지막 수사였다. 다음 인사에선 수사와 관련없는 자리로 승진이나 이동할 차례였다. 그는 "물러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 없이 수사했다. 이만하면 행복한 검사 아닌가"라고 했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승지(承旨-정3품) 남종삼(南鍾三·1817∼1866)의 종손인 그 역시 정3품 차관급(검사장)을 마지막으로 관복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