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람

서울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레지던트 여자 선배가 들려준 얘기다. 환자 보호자인 중년여성이 다급하게 의사 선생님을 찾더란다. 마침 동료인 남자 레지던트는 다른 응급환자를 보고 있었다. 선배가 "제가 볼까요"라고 나서자,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럼, 아가씨가 봐주시겠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처녀나 젊은 여자를 부르는 호칭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동년배 남자 의사를 '선생님'으로 불렀던 호칭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병원에서 여의사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아가씨, 언니는 물론 “여기요”도 있다. 선배는 처음엔 어려 보이는 외모나 왜소한 체격 탓으로 돌렸다고 했다. 그러나 주위의 동료 여의사들도 심심찮게 그런 호칭으로 불린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이다. 반면, 남자 의사들이 ‘총각’ ‘오빠’(?)로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여의사들은 때때로 누군가의 ‘언니’가 되고, ‘아가씨’가 되어야 하는 걸까.

여권(女權)이 신장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성보다 여성의 지위를 다소 낮게 보는 경향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산부인과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한 의사는 대부분 남자였으니, 나이 드신 분들께 여의사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980년 여의사 비율은 전체 의사 2만2564명 중 3070명으로 13.6%였다. 그러나 2009년 의사 면허자 9만8434명 중 여성은 2만1816명으로 22.2%이다. 현재 의대를 마치고 서울 주요 병원에 인턴 또는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젊은 의사의 40~50%는 여자다. 앞으로 의사 절반이 여자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여의사에게 꼭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해달라는 게 아니다. 의료진과 환자가 수평 관계가 된 지 오래다. 환자를 ‘○○님’으로 존중하고 예우하듯이, 환자 또한 의료진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비단 여의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간호사, 간호조무사와 같은 다른 여성 의료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명 또는 몸을 맡기고 치료받는 엄숙한 의료 현장에서, 막말에 가까운 ‘언니’ ‘아가씨’와 같은 호칭은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