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동지들. 보상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하네. 눈감는 순간까지 풀지 못했던 한(恨), 이제 조금은 풀리는가. 늦었지. 많이 늦었어"
29일 오후 '재일교포 북송(北送) 저지 경찰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김홍윤(84)씨가 나직이 말했다. 김씨는 재일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1959년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밀파(密派)된 66명의 북송 저지 공작대의 일원이다. 검버섯 가득한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 있으니 이런 순간이 오네요. 50년 동안 철저히 잊혀진 우리들에게도…." 공작대원 동지인 조승배(79)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일교포 북송 저지 공작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내무부 치안국이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 북송 저지를 위해 1959년 9월 경찰시험 합격자 24명과 재일학도의용대 출신 41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66명으로 공작대를 결성해 일본에 잠입시킨 사건이다. 북송 저지 방법을 찾던 정부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당시 경찰 간부시험에 응시해 합격 소식을 기다리던 김씨는 '나라를 위한 특수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우이동 골짜기의 훈련장에 공작대원 66명이 모였다. 3개 소대로 편성돼 두 달여 동안 암호 송·수신, 폭발물 설치 등 공작원 교육을 받고 7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밀항했다. 김씨에게 부여된 가명(假名)은 '김석천'이었다.
1959년 12월 12일 오전 마산항을 출항한 배 밑창에서 30여 시간을 버틴 끝에 히로시마(廣島)현 구레(吳)항에 도착했다. 재일 한국인 975명을 태운 첫 북송선이 니가타(新潟)항을 떠난 날이다. 이들의 임무는 당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 정권의 지령을 받고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주도한 일본적십자사 파괴, 북송을 밀어붙인 일본측 요인 암살, 북송선이 입항하는 니가타항과 연결되는 철로 파괴 등이었다. 밀항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12명의 대원이 숨졌다.
남은 대원들은 은신처를 마련하고 공작 활동을 준비했지만 한국 정부의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줄었다.
당시 치안국은 공작원 귀환을 위해 비밀리에 배편을 준비해 보냈지만 일본 경찰에 노출돼 1960년 5월 3일 시모노세키(下關)항에서 김씨 등 24명 전원이 체포됐다. 이들은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 6개월가량 수감돼 있다가 1961년 송환됐다.
고국에 돌아왔지만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받은 고문과 혹독한 형무소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대원이 많았다. "걱정 말고 작전하라. 경찰 임용과 생계 지원을 보장한다"던 약속은 "과거 정부의 정책"이란 말과 함께 깨졌다. 그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생각도 했지만 소장에 붙일 인지대금이 모자라 접어야 했다. '우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소주잔을 비웠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김씨는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그는 "이대로 잊혀지면 저승의 동지들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위원회는 2년간 조사를 거쳐 관련 사실을 확인했고, 2009년 심대평 의원이 보상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작년엔 경찰청 도움을 얻어 밀항 중 조난당해 숨진 12명의 합동위령제도 지냈다. 북송 저지 공작대원과 후손들에겐 앞으로 보상금과 위로금 등 모두 104억여원이 지급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