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미국 뉴욕 맨해튼광장 한가운데에 부식된 철판으로 만든 조각('기울어진 호')이 세워졌다. 경관을 해치고 보행에 불편을 준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쳐 결국 1989년 철거됐다. 미국 미니멀리즘 조각가 리처드 세라(Serra·72)의 작품이다. 이는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해 실패한 공공 조형물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6일부터 내달 21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한 획(一劃)'전에 나온 세라의 드로잉(drawing) '한트케(Handke, 1993)'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작가가 강철 작품을 통해 꿈꿨던 것은 '무게와 크기'가 아니라 '중력과 균형'이었다.

세라는 가로 세로 193㎝의 노란색 정사각형 종이를 이등분한 후 화면의 하단에 검은색 오일 스틱을 녹여서 두툼하게 발랐다. 평평한 노랑과 두툼한 검정의 두 색면(色面)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화면에 탄력을 가져온다. 검은색의 무게감과 부피감이 압축감과 팽창감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이 작품은 강철로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을 만들어 '무겁고 거칠다'는 철에 대한 통념을 깨부수고자 하는 세라의 작업 철학을 반영한다. 조각 못지않게 회화를 중시하는 세라에게 드로잉은 창작의 원천, 원형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이우환이 1979년 종이에 수채로 그린‘조응’(위). 이 작품은 2007년작인 조각작품‘관계향-대화’(아래)를 위한 개념적 드로잉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태호, 김호득, 서용선, 유현경, 윤향란, 이우환, 정상화, 정현 등 국내 작가 8명과 안토니 곰리, 류샤오둥, 리처드 세라, 아니쉬 카푸어, 주세페 페노네, 샘 프란시스, 시몬 한타이 등 외국 작가 7명의 드로잉 작품 30여점이 소개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드로잉은 작업을 위한 스케치 정도로 여겨졌지만 이제 드로잉은 간단한 연필 스케치는 물론 회화에 근접한 작업까지 작품을 위한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드로잉은 작가의 작업 의도와 철학, 내면 풍경 등을 보여주는 숨겨진 일기장이다. 그 때문에 "법(法)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한 획에서 나왔다. 한 획이란 존재의 샘이요, 모습의 뿌리다"라고 한 청나라 화가 석도(石濤)의 일획론(一劃論)을 전시 주제로 삼았다는 것이 학고재갤러리측의 설명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중국 작가 류샤오둥(劉小東·48)의 드로잉 '무제'는 나무 팔레트 위에 색색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품. 2009년 한국에 와 인왕산 그림을 그린 작가는 작업이 끝난 후 그림에 사용했던 물감을 손으로 찍어 발라 팔레트 위에 작업 도중 머릿속에 떠올랐던 개념을 표현했다. 관객들은 붓놀림의 흔적과 물감이 남아있는 팔레트를 보고 완성작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이 밖에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바르고 무수히 수직과 수평의 선을 그은 정상화(79)의 '무제83-12-B', 조각 작품을 위해 철판과 바위를 스케치한 이우환(75)의 '관계항-대화' 등이 전시에 나온다. (02)720-1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