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KBS 1TV에서 방송을 시작한 '7080세대' 복고풍 버라이어티 '낭만을 부탁해'. 여행을 통해 40~50대 중년층의 향수를 자아내는 이 프로그램은 자막 폰트(서체·font)도 주제에 맞게 다른 버라이어티에서 사용되는 것들보다 예스럽고 투박하다. 특히 3~4회차에 걸쳐 방영된 '추억의 MT'편에선 획이 굵고 글자 끝을 길게 삐친 서체를 주요 자막 폰트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70~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글씨체로 사용된 이 폰트는 당시 국내에서 개발된 폰트가 아닌 북한에서 개발된 '옥류체(玉流體)'다.
옥류체는 김일성이 일제강점기 백두산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만든 청봉체(淸峰體)를 컴퓨터 폰트화한 서체다. '로동신문' 등 북한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이 폰트는 2000년대 중반 남북 폰트디자인 교류를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그런데 최근 북한 폰트가 그래픽디자인계의 복고풍 바람을 타고 있다. 폰트 개발업체 '폰트뱅크' 손동원 대표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피로감,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로 투박한 글씨체로 그래픽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디자이너 A씨는 "최근 1~2년 새 복고풍 폰트를 찾으며 북한 폰트를 쓰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이는 기존에 사용되지 않던 폰트를 써 참신한 디자인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이 굵고 투박한 북한의 폰트가 예스러움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폰트는 인터넷 P2P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 서체학자 박병천 경인교대 명예교수는 "방송자막은 물론 포스터·현수막 등에서도 심심찮게 북한 폰트를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북한 폰트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복고풍 분위기를 자아내고 싶을 때는 어려움 없이 북한 글씨체를 쓸 수 있게 된 셈이다. 가장 폭넓게 쓰이는 옥류체를 비롯해 가로획이 가늘고 세로획이 굵은 광명체(光明體), 정사각형 획에 굵은 글씨체인 천리마체 등 국내에 소개된 폰트 수만도 200여개에 이른다.
하지만 서체 전문가들은 한국의 70~80년대 서체와 북한의 폰트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폰트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한글미디어디자인연구소 노수용씨는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폰트 개발 수준이 높아져 비약적인 발전을 한 반면 북한의 폰트는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의 서체는 획과 획 사이의 간격이 너무 떨어져 엉성하거나 글자 한자 한자에 균형감이 떨어져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과거 70~80년대 다듬어지지 않은 글자체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손동원 대표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폰트를 만들어 온 반면 북한은 90년대 이전의 폰트가 그대로 남아 유지되고 있는 탓"이라고 설명했다.
KBS '낭만을 부탁해' 관계자는 "복고풍인 프로그램 분위기에 적합한 폰트를 찾다가 쓰게 된 것이지 북한 폰트인지는 몰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