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왼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엔 지문이 없었다. 하긴 열두 살부터 50년 대나무를 깎아온 그의 손가락에 지문이란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簾匠·대나무로 발을 만드는 장인)' 기능보유자 조대용(61). 손을 보여달라고 하자 덤덤하게 말했다. "지문이야 대나무 깎을 땐 없어졌다가 또다시 생기는기고…."
7일 오후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한편에 마련된 작은 공방. 조씨는 가는 대나무를 명주실로 엮어가며 한올 한올 이어갔다. 열매처럼 주렁주렁 늘어진 고드래를 조씨의 손이 훑어갈 때마다 가느다란 대오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18일까지 개최하는 '2011 여름, 천공(天工)을 만나다―중요무형문화재 43인의 시연과 전시'. 최고 장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과 함께 그 제작 과정을 선보이는 행사다.
전통 한옥에서 발은 필수품이었다. 여름철엔 강한 햇볕을 막아주고, 안을 볼 수 없게 사생활을 보호했다. 조선시대 양갓집 여자들은 한여름에도 대청마루로 나가지 못한 채 안방 문앞에 발을 걸어놓고 더위를 식혀야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한옥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급증하면서 대나무 발은 급속히 수요가 줄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집은 다 대발을 갖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유품이라면서 대발을 갖고 와 수선해 달라는 사람이 심심찮게 있었거든. 요즘엔 한 달에 하나 주문받기도 힘들어요."
조씨 집안은 4대(代)째 대나무 발을 만들고 있다. 조선 철종 때 무과에 급제한 조씨의 증조 할아버지가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기다리다가 대발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했고, 철종이 크게 감탄했다는 구전이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열두세 살 때부터 아버지가 일감이 밀리면 옆에서 거들곤 했어요. 군대 가기 전에 영장 받아놓고 처음으로 한 점을 온전히 내가 만들었지."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장인의 길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과 장려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고 2001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다. 통영 대발을 잇는 장인은 그가 유일하고, 전남 담양에서 발 제작 장인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뿐이다.
대발 만드는 작업은 '반복'과 '기다림'이다. 그는 "해마다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대나무밭에 가서 1년 동안 쓸 대나무를 한꺼번에 채취한다"며 "이때 안 하면 대나무에 물이 올라 있어 쉽게 좀이 먹는다"고 했다. 채취한 대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껍질을 벗기고 칼로 속대를 훑어 말린다. "아이 돌보듯 틈틈이 내다보고 만져 주면서 말려야 해요. 새벽 이슬을 맞게 하고 햇볕에 말리기를 두달가량 반복하게 되면 대나무 본래의 푸른색이 탈색돼 연한 미색으로 변하면서 견고해지죠."
직접 만든 쇠철판(고무쇠) 구멍에 대오리를 통과시키면서 가늘게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고 나면 지문이 닳아지고 없다. 대발 하나(가로 120×높이 180㎝)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0일 정도. 2000개의 댓살을 다듬고 엮는 데 드는 시간이다. 조씨는 "옛 선조들은 발 걸어놓고 저 먼산 보면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했다. 대원군이나 추사 같은 분들은 발을 걸어놓으면 절로 시가 나왔다고 하더라"면서 "발 문화는 한·중·일에만 있는 운치 있는 문화"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시연을 하고 있지만 그는 걱정이 적지 않다. 2남1녀 중 가장 손재주 좋은 둘째 아들 조영(32)씨를 겨우 설득해 가르치고 있지만 아들은 이 일로 생계를 이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조씨도 그런 아들에게 더 권할 생각이 없다.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딴 조영씨는 본업에 매달리면서 틈틈이 일을 배우고 있다.
"밥벌이가 돼야 배우러 오죠. 문화재청에서 지원하는 한달 보유자 지원금 130만원이 소득의 전부일 때도 있어요. 옆 공방 나전이나 소목장만 해도 배우러 오는 애들이 끊이지 않는데, 염장은 취약한 전통 공예 중에서도 특히 취약한 종목입니다.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으면 뭐 합니까." 그가 속내를 털어놨다.
"몇 해 전 일본 오사카에서 교포 한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일본에서 11대째 발 만드는 가업 잇는 분이 오사카에 발 박물관 짓는다고 제 작품을 하나 가져갔어요. 일본만 해도 신사나 음식점 칸칸이 햇빛 가리개용으로 실용화됐는데 우리는 그렇게 왜 못합니까. 먹고 살아야 되니까 지금이라도 일본에서 요청 오면 거기 갈랍니다."
행사는 매일 8~9개 종목 보유자의 시연이 오전 10~12시, 오후 2~4시 4시간씩 진행되며 미리 일정을 확인한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무료 관람. (02)3011-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