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1월 10일. 이날은 오길남·신숙자 부부의 결혼 14주년 날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부부는 헤어져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오길남은 1주일간의 공작 교육을 받고 짧은 휴가를 나온 터였다. 도청을 걱정한 부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퉜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가세요."

"나 혼자 가면 당신하고 애들은?"

"또 그 얘기. 애들을 정말 공작원의 딸로 만들 생각이에요?"

"…."

―아내가 탈북을 권했다는 건가.

"그랬다. 아내는 11월 11일 아침까지 내가 망설이자 난데없이 내 뺨을 때리며 말했다. '사람이 한 번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요. 당신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데리고 북으로 들어온 잘못은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한 범죄자의 딸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빼내줘요. 안 되면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혜원 아빠, 나가세요.' 지금도 그때 아내가 한 말이 생생히 떠오른다. 아내는 그새 강한 엄마로 변해 있었다."

1986년 11월 21일 덴마크 코펜하겐공항에서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은 독일에서 한 달간 조사받고 풀려났다. 크리스마스 직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는 바로 윤이상에게 전화했다. "선생님, 저 오길남입니다. 이북에서 도망해 왔습니다. 제 가족을 도와주십시오."

―왜 한국이나 독일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

"윤이상씨 힘이면 가족을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가족을 북에 인질로 잡힌 상태였다. 어떻게 한국 정부에 얘기할 수 있었겠나."

―귀국 때까지 5년간 계속 윤이상에게 매달렸다는 건가.

"그랬다. 그 길 말고는 가족을 찾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1987년 4월 윤이상이 하노버로 와 탈북 후 처음 만났다. 그는 '왜 사람이 그렇게 가볍냐. 조금만 참고 있었으면 좋은 직장에 갔을 텐데. 가족을 생각해서 다시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대답을 못했다."

그해 10월 윤이상은 하노버음대로 오길남을 다시 찾아와 아내가 쓴 편지를 전했다.

"'혜원 아빠 보세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펼치기도 전에 눈물이 흘렀다. '원망하지 않는다.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내의 편지를 읽으니 나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이상이 편지를 읽는 나를 보며 '부인이 정말 훌륭하다. 돌아와도 괜찮다고 하지 않나. 북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권했다."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독일 체류 시절, 신숙자씨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두 딸 혜원·규원 자매를 지켜보고 있다. 음악을 좋아했던 신씨는 어려운 생활 형편에도 아이들에게 바이올린만은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아내와 두 딸을 독일로 내보내 주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윤이상은 기분이 나빴던지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당신은 미제 고용간첩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경솔한 짓을 하면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명심하라'고 소리쳤다."

―평양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안 했나.

"왜 안 했겠나. 죽을 때 죽더라도 가족과 함께 있으면 낫지 않겠나 싶어 숱한 날을 돌아갈 생각을 했지. 하지만 가봐야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1991년 오길남은 윤이상의 호출을 받고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다. 오길남에게 건네진 것은 가족의 육성 녹음테이프와 사진 6장. 그 마지막 만남의 현장에 대해 윤이상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간절하고 확실한 소리, 두 딸아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며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하면서 히히덕거렸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가 통곡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호통치면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쫓아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묘사돼 있다. 실제로 그랬나.

"그랬지. 애들 사진 보며 참 못생겼다고 했다. 아이들의 얼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제정신일 수 있었겠나.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았는데…. 못난 아비 만나 생지옥에서 고생하는 아이들이 핼쑥하게 큰 모습을 보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걸 히히덕이라고 표현하다니 인간이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최근 '통영의 딸' 구출운동에 대해 정부 반응은 없나.

"언론에 몇번 보도가 나오고 국가인권위 김태훈 북한인권특위 위원장이 만나자고 해 한 번 만났다. 지금까진 그게 전부다."

오길남씨는“죽기 전에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울어보는 게 하나 남은 소원”이라 했다.

―가족을 만나면 뭘 하고 싶나.

"다른 게 있겠나. 그냥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이다."

―당신이 입북시키려다 포기한 당시 유학생들을 만나본 적 있나.

"탈출 직후 한 사람은 직접 만나 '북한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일러줬다. 또 한 사람은 3년 전쯤인가,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대학교수가 돼 있더라. 우리 둘의 사연을 알고 있던 혼주가 그를 불러 내게 소개시키려 했는데 날 쓱 보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알고 보니 그가 송두율 석방대책위 위원이었다. 나는 그의 북한행을 막아준 은인이 아니라 배신자였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를 위해 내 가족을 희생했는데…. 허탈했다."

["북한 탈출하다 죽은 아이들 세렝게티서 죽은 얼룩말과 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