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영화를 공짜로 보는 방법이 있는데 아십니까? 극장 들어갈 때 표 검사하시는 분이 표를 달라 그러면 시치미 뚝 떼고 이렇게 말하세요. '들락날락해서 죄송합니다'라고요. 저도, 자꾸 들락날락해서 죄송합니다."
1971년 3월 30일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 DJ를 맡게 됐을 때였다. 트윈폴리오 고별 선언 이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선 자리였다. 내 첫 멘트였다. 전유성이 해준 말이었다.
'0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는 동안 가장 오래 함께했던 이가 바로 전유성이다. 그는 '0시의 다이얼' 스크립터였다. 1971년 10월 서울시에 위수령(衛戍令)이 내렸을 땐 말 그대로 24시간을 붙어 지내기도 했다. 야간 통행증이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광화문에 여관을 잡아 방송이 끝나면 그와 함께 잤다.
전유성을 처음 만난 건 서울 명동 생맥주 홀 오비스캐빈에서 트윈폴리오로 활동할 때다. 당시 알게 된 김용웅씨가 관할한 지역 중 하나가 아스토리아 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그가 어느 날 부탁을 해왔다. 나이트클럽 총지배인 아들이 연극이랑 팬터마임을 한다는데 도와줄 수 없느냐고. 다음 날 서울 효자동 인근 다방에서 부자(父子)를 만났다. 아버지가 "정말 부족한 게 많은 아들인데 잘 좀 부탁드린다"고 했다. 아들은 성냥개비 같은 마른 몸에 숫기가 없어 보였다. 그가 당시 서라벌 예술대학 학생이었던 전유성이었다.
그날 이후로 늘 그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일종의 로드 매니저 역할을 그가 했다. 기타를 들어주고 전화를 걸어주는 등 잔심부름이 그의 몫이었다. 공연이 열리면 그가 직접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고, 공연 구성을 짜줬다. 가끔 팬들과의 만남이 두 장소에서 동시에 열릴 때면 전유성을 먼저 보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 혼자 팬들을 상대했다.
내가 '0시의 다이얼' DJ를 맡게 된 이후 그는 방송 원고를 써주기도, 무대에 서기도 했다. 나는 따로 차비와 원고료를 챙겨줬다.
국내에서 개그맨이란 말을 처음 쓴 것도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0시의 다이얼'은 한 달에 한 번씩 현장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서울 진명여고 강당에서 전유성은 김승식과 함께 무대에 섰다. 김승식은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후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부른 이광조 매니저를 한 사람이다. 기획을 잘했고 머리가 비상했다. 전유성은 김승식과 함께 요즘 개그맨들 하듯이 둘이 말을 주고받으며 청중을 웃겼다. 무대에 서기 전에 둘은 "개그 스테이지를 준비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다음부턴 사회자들이 그를 "개그스타 전유성"으로 불렀다.
'0시의 다이얼'에 '팝송 영어'란 코너가 있었다. 영어 가사를 해설해 주는 내용이었다. 전유성이 이 코너 사회를 맡은 신동운씨에게 "내 스스로 '개그스타 전유성입니다'라고 말하긴 부끄럽다"고 했다. 그러자 신동운씨가 말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해. 개그 하는 사람이니까 개그맨이지."
그 시절 이장희의 '겨울이야기'란 토크 송을 패러디한 것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로 시작하는 가사를 '제 연인의 이름은 한심이었습니다'로 고쳐 불렀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용은 전유성이 채웠다. 훗날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정광태가 이를 응용해 '한심이'로 데뷔, '한심이 시리즈'를 유행시켰다.
'0시의 다이얼'에 출연하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당시 방송사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방송을 듣다 위험한 멘트가 나오면 이를 심의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는 표현만 해도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전유성이 방송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부부싸움을 뭐라 부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자답했다. "육박전이죠!" 그 뒤 석 달간 그는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
반전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때 종종 같이 어울렸던 이 중 최은자라는 누나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승무원이었다. 그녀가 경남 진주 가는 비행기에서 '육박전' 이야기를 꺼냈다. 박정희 대통령도, 육영수 여사도 박장대소했노라고, 후에 그녀가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