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어느 날 프랑스 국립도서관. 검은 머리칼을 짧게 친 39세의 한국 여성이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직지심체요절. 그때까지 중국 책으로만 알려져 있던 책의 맨 뒤에서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이라는 내용을 접한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5년 뒤 그녀는 파리에서 열린 '책의 해 기념 고서(古書) 전시회'에서 "직지는 1377년 금속으로 찍은 세계 최고(最古) 활자본"이라고 공개해 전 세계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항의가 빗발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서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고?"

왼쪽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음을 특종 보도한 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 오른쪽 사진은 그해 한국을 찾은 박병선 박사가 서울 인사동 통문관에서 국내 서지학자들과 함께 직지심체요절 영인본(影印本)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소란의 주인공은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 직원이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 박씨는 이 전시회와 유럽 내 '동양학자대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최고 활자본임을 입증해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본지 1972년 5월 28일자 1면 특종 보도〉

가난한 유학생에서 직지 대모로

23일 별세한 '직지(直指) 대모'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55년 홀로 프랑스로 유학 갔다.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여성 1호였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 스승인 이병도(1896~1989) 교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서들을 약탈해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된다. 유학 가면 한 번 찾아보라"고 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박 박사는 10여년간 도서관·박물관 등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러다 먼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것. 그녀는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 아침에 도서관에 출근하면 동료들이 '눈이 왜 빨개? 너 어제 울었니'라고 묻기 일쑤였다.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어보다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지난 2008년 ‘조선조의 의궤’개정판을 내려고 한국을 찾은 박병선 박사는 “자료를 찾으려고 몇 년을 두고 뒤지다가 마침내 찾아내는 기쁨이 어떤 건지 아세요? 길거리를 가다가도 그걸 생각하면 벙글벙글 웃음이 나옵니다”하며 웃었다.

"감자로도 만들고, 지우개로도 만들고…. 그러다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직접 잉크에 찍어봤더니 책에 찍힌 활자 형태와 같은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확증을 한 것이죠."

의궤와의 운명적 만남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다니던 1975년 베르사유궁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더니 사서가 푸른 천을 씌운 큰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책을 펼치니 조선 왕실 기록물인 '의궤(儀軌)'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후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破紙)'로 분류돼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한국 여자'가 외규장각 문제를 제기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응은 차가웠다.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1979년 사표를 강요받았다. 사실상 해고였다. 한국 정부도 그녀를 못 본 척했다. 해고된 뒤에도 박씨는 '개인' 자격으로 10여년을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외규장각 도서 내용 파악에 매달렸다. "점심 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봐 밥도 안 먹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 놓고 있는 그녀를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라고 불렀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6월. 박씨는 마침내 외규장각 도서 297권이 145년 만에 모두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지켜봤다. 외규장각 도서 귀환 환영식에 참석차 귀국한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 같다"며 감격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의궤가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다시는 프랑스에 가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가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일 많아 바쁘다고 했는데

박씨는 생전 인터뷰에서 "긴 시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 학자들의 냉대였다"고 했다. "동양학자대회 때 직지를 발표하고 나니 어떤 한국 학자는 '네가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외규장각 도서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한국 외무부에서 왜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느냐며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했었다.

그녀가 고국의 따뜻함을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병마(病魔) 때문이었다. 지난 2009년 귀국했던 그녀는 뜻밖의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가족도 돈도 없이 막막했던 그녀의 사연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성원이 답지했다. 덕택에 지난해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연구할 게 많아 프랑스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로지 우리 고문서 찾기와 의미 밝히기에만 매달렸던 그녀였다. 일제 강점기 때 프랑스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해독해 독립운동사의 사각지대를 메우겠다며 연구 의욕을 보였지만 그 꿈은 후학들에게 숙제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