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제금가’ 짐발리스트의 공연 소식을 전한 기사(1924년 11월 20일자)

1924년 11월 27일 저녁, 경성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현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러시아 출신 세계적 제금가(提琴家·바이올리니스트) 짐발리스트(E.Zimbalist)의 공연이 열렸다.

"조선 악계에서 손꼽아 기다리든 세계덕 악성 '짐발리스트'씨는 왓다. 그의 귀신가튼 '바요링' 독주대회는…만장한 천여명 텽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얏스며, 때로는 텽중을 취케하야 자못 선경(仙景)으로 잇그는 늣김이 잇섯다.…어느 듯 순서의 끄틀 마치게 되얏스나 텽중은 헤여질 줄을 모르고 씨의 천재의 기술을 더 듯고저 하는 박수소리는 깁허가는 밤 경성의 거리를 흐들고 말엇다."(1924년 11월 28일자)

서양 음악을 하는 악가(樂家)들이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 '바요린은 그럴 뜻도 하나 피아노는 아주 몰으겟다'는 '비속한 청중'이(1934년 4월 15일자), 쌀 한말 값인 3원이나 되는 입장료를 내고 공회당에 몰렸다. 청중은 '코주부들의 턱밋테 끼고 손꾸락을 떠러야 소리나는 양국(洋國) 깡깡인'(1931년 2월 19일자) 바이올린 연주에 2시간 반 동안 숨죽였다.

"조선에서 조선사람으로 '빠요린'을 (처음)구경 식혀준" 홍영후(洪永厚/蘭波)는(1931년 2월 19일자), 짐발리스트의 공연을 앞두고 "전무후무의 독주회를 열게 되엿스니 우리는―더구나 악가의 한 사람인 나는 감격한 눈물 흘릴 외에 무엇을 다시 말하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선교사의 어깨너머로 혹은 대한제국 군악대로 서양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지 삼십여년 동안 "가극다운 가극 한 번을 구경하지 못하고, 관현악다운 관현악 한 번을 드러보지 못하고" 지내오다 맞은 '천재일우'의 기회에 감격했다. (1924년 11월 24일자)

짐발리스트뿐만 아니라 1923년에는 '4줄짜리 거문고(四絃琴)'를 켜는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모두 경성에 출현했다. 2월 12일 '세계일류의 반(班)에 열한 제금가' 팔로(Katheleen Parlow·캐나다 출신) 여사가 일인(日人)교회 성가대의 초청으로 독주회를 연 것을 비롯, 그해 5월 23일에는 '세계 제1위의 제금가' 크라이슬러(F.Kreisler·오스트리아)가, 이어 11월 5일에는 '세계적 제금가로 신진기예한' 하이펫츠(J.Heifetz·러시아 출신)가 경성공회당 무대에 섰다. 당시 세계 최강국의 하나로 떠오른 일본 공연에 나섯다가, 일인들의 주선으로 경성에 잠시 들러 연주회를 가진 것.

홍난파의 독주회를 알린 기사(1924년 1월 18일자)

대가들의 공연이 조선 음악계를 자극했는지, 음악 활동은 물론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는 등 '잡다한' 일을 벌이던 홍난파가 1924년 1월 19일,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인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24년 1월 18일자)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이 아닌 구미로 음악 공부를 가는 '청년'들이 눈에 띄기 시작, 채동선(蔡東鮮) 계정식(桂貞植) 안병소(安柄昭·이상 바이올린) 등이 독일, 윤성덕(尹聖德) 현제명(玄濟明) 안기영(安基永·이상 성악) 박경호(朴慶浩·피아노) 등이 미국에 유학, 조선 악가의 저변이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