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사진 왼쪽)과 루치안 프로이트.

영국에서 최고 영예로 여겨지는 왕실의 훈장과 작위를 거부한 인사가 지난 40여년간 277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과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등 1951년부터 1999년 사이 영국 왕실의 작위를 거부한 사람들의 명단을 영국 정부가 처음으로 공개했다고 텔레그래프가 25일 보도했다.

이 명단에는 화가와 소설가, 언론인 등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와 조각가 헨리 무어, '제3의 사나이' 등을 쓴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 등도 명예작위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새' '사이코'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히치콕은 1962년 대영제국 훈장(OBE)을 거절했다가 1980년 4월 사망 직전 기사 작위를 받았다. '공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 등 맨체스터 공업지역을 주로 그린 화가 LS 라우리는 무려 5번이나 작위를 거부했다.

이들이 훈장과 명예작위를 거부한 이유는 다양하다.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로알드 달은 1986년 대영제국 훈장을 거부했다.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아 자신의 아내도 부인(Lady)이라는 칭호를 받기 원했는데 훈장이 주어지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인도 총독을 지낸 루이스 마운트배튼 역시 처음 제안받은 남작 계급이 너무 낮다고 거절해, 이후 한 단계 높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짐 캘러헌(노동당) 전 총리의 아내 오드리는 1979년 작위를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당시 남편 캘러헌은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과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작위가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기가 달라 이번 명단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태양의 제국'으로 유명한 소설가 J.G.발라드는 2003년 훈장을 거부하며 "실체도 없는 왕실이 주는 메달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받았던 작위나 훈장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1965년 훈장(MBE)을 받았던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은 영국군의 나이지리아 내전 개입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로 4년 후 이를 반납했다.

이번 명단 공개는 시민단체들이 정보자유법을 근거로 왕실 자료 공개를 끈질기게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영국 정부는 "지금까지 지명자의 2%가 작위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영국의 명예 제도(honour system)에는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등 5개의 귀족 작위와 기사(騎士), 그리고 그 아래에 OBE 등 몇 가지 훈장이 있다. 공·후·백작은 세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영국 왕실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선정해 주는 작위는 자작과 남작, 기사, 훈장 등이다. 매해 신년(新年)과 여왕의 생일이 있는 4월에 수여자를 발표하며, 1953년 6월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때도 작위를 수여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