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은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홀대받아왔다. 우리의 무관심 탓이었다. 그러나 건립 122년만에, 한 이방인의 사진을 통해 독립문에 얽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30년이 넘는 필자의 사진 인생을 통해 발굴한 이 사진들은 1세기가 넘는 세월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사실을 직시하게 해 준다. 우리 문헌에도 없는 역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사진을 제공해 준 독일인 마이어씨의 후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독립문은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한 나라임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선인들의 뜻에 기반해 건립되었음을 우선 알아야 한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897년 독립문을 건립할 때는 무악재 고갯길이 독립문의 아치 사이로 보인다. 지금 옮겨진 독립문은 원형대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아치 방향이 무악재가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 터를 바라보도록 한 것은 본래의 건립 취지를 배재한 치명적 실수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더구나 아직 그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다.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을 이런 식으로 해체해 이전한 것은 문화 파괴행위이다. 독립문에 담긴 중요한 사상과 취지를 알지못한 채, 어떤 명분도 없는 단순 조형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화재 예방 차원에서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광화문 앞에 세웠던 해태상을 지금 와서 다른 곳에 옮기고, 다른 쪽으로 보도록 한다면 해태상의 존재가 필요 없거나, 의미가 훼손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봐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관련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단순히 독립문의 변천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문을 이전하면서 본래의 건립취지와 다르게 왜곡되어버린 ‘역사’를 되새김질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분명히 독립문이 영은문보다 약 40~50m 앞쪽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라도 독립문 아치가 다시 무악재를 마주 보도록 해야 제대로 된 문화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다. 그래서 대륙에서 육로를 통해 조선에 들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무악재 고갯길이었다.
당시 무악재 고갯길은 일반인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았다. 또한 이방인들도 각종 신식문물을 나귀에 싣고 한양으로 들어올 때면 산적들이 많아 며칠간 동행을 모아 고개를 넘어 간다고 해서 무악재(모아재)라는 속설이 생겨난 것이다.
명나라 때 청기와를 올려 연조문(延照門)이라 부르던 것을 이후 영은문으로 개칭해 중국 사신을 영접했다. 이런 위치를 감안해 볼 때 이곳은 북쪽지방에서 한양에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방인들은 독립문에서 서대문 사이 ‘의주통’이라 불렀던 길목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이같은 사진을 촬영했을 것이다.
무악재길은 절개된 돌산이다. 가파른 고개다. 영은문의 주초석(기둥)은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독립문의 1850개 석재들도 같은 재질이다
독립문이 영은문보다 한발이라도 앞쪽에 건립해 이방인을 더 가깝게 맞이하고 알리기 위해 세운 뜻을 이제서야 이 사진을 통해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인은 그간 사진을 근거로 잘못된 문화재의 역사를 지적해왔다. 그러다보니 칭찬보다 욕먹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찾아 나선 것 뿐이다. 이렇게 역사를 밝히지 않으면 또다시 독립문은 개발 열풍 속에 훼손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무조건 철거하고 복원하는 것 보다 문화재가 세워진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원형대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진솔하게 물려주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 앞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