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한국) 'Seoul'(서울) 'Kaesong'(개성). 필리핀의 500페소 구권 지폐 뒷면에 있는 글자들이다. 어쩌다 이런 문구들이 외국의 화폐에 들어가게 됐을까.
500페소 구권의 주인공은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 前 상원의원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52) 현 대통령의 아버지다. 최연소 시장·상원의원 등을 거쳐 차기 대통령감으로 거론됐지만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항하다 1983년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암살당했다. 이를 계기 마르코스는 국민들의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당했다.
500페소 구권에 원래 예정됐던 주인공은 마르코스였다. 하지만 혁명 직후 당선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신 남편의 초상화를 실어 500페소를 발행했다. 덕분에 500페소에는 민주 투사로 활동하던 아키노 의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중에는 종군 기자로 활약한 내용도 있었다. 그는 17세 때 최연소 종군 기자로 한국전을 취재했다. 500페소 구권에 쓰인 한국과 관련된 문구들은 당시 그가 마닐라 타임스에 쓴 기사의 일부다. '1st Cav knifes through 38(제1기병사단 38선 돌파)'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한국전에 대한 소식과 함께 한국에 파견된 필리핀군 제10 전투대대에 대한 내용도 언급돼 있다. 필리핀은 6·25 당시 약 1200명의 전투부대를 파견했다. 터키에 이어 9번째로 큰 규모다.
재작년 12월 필리핀 중앙은행은 신권을 내 놨다. 새 500페소 화폐에는 베니그노 아키노·코라손 아키노 부부의 모습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하지만 신권이 발행됐다고 해도 아직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필리핀 화폐의 95% 이상은 구권이다.
한편 최근에는 이들 부부의 아들인 현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과 한국계 필리핀 방송인 그레이스 리(30·한국명 이경희)가 연인 사이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