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크(Chink)'는 스포츠전문 케이블 방송 ESPN이 미국프로농구(NBA) 뉴욕 닉스에서 요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제레미 린을 인종적으로 비하했다고 해서 논란이 된 단어다. 미국에선 중국계를 비롯한 아시아계를 조롱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칭크'는 16세기엔 전혀 다른 뜻이었다.
"오 담장, 감미롭고 사랑스런 저 담장/ 그 담장이 그녀의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가로막고 서있네/ 내게 '틈'을 보여다오. 그 사이로 (그녀를) 엿 볼 수 있게."
셰익스피어의 로맨틱 코미디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대사다. 작품은 두 쌍의 젊은 남녀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 숲 속 요정의 도움으로 결혼에 골인한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사랑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그래서 날개 달린 사랑의 천사 큐피드가 장님으로 그려져 있는 거야." 러브레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문구 역시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명언이다.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울리는 '웨딩마치'도 멘델스존이 이 희극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얼마나 연인을 보고 싶었으면 담벼락에 '틈'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까. 이 '틈'이 원작엔 '칭크(chink)'라고 쓰여 있다. 셰익스피어 시절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옷의 틈(chink in the armor)'은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관용구다. 아무리 촘촘하게 만들어진 갑옷이라도 어딘가엔 반드시 '칭크'가 있기 마련이다. 상대는 그 '틈'을 찾아내 예리한 칼을 밀어넣는다. 그래서 '갑옷의 칭크'는 '치명적인 약점' 또는 '급소'란 뜻이어서 '아킬레스 건'과 동의어로 분류된다.
이 관용구가 동양계를 모욕했다고 해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발단은 바로 제레미 린이다. 올시즌 벼락스타로 떠오른 린은 얼마 전 죽을 쑤는 바람에 팀의 6연승 질주가 마감됐다.
ESPN의 모바일 뉴스사이트가 린의 부진이 패배를 자초했다며 제목을 '갑옷의 칭크'라고 달았다. 누가봐도 린을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방송국 측은 즉각 책임자를 해고시켜 버렸다. 게임을 중계한 스포츠캐스터도 똑같은 표현을 썼다고 해서 30일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사실 이 캐스터는 잘못이 없다. 해설자에게 "린이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며 "대체 그의 '갑옷의 칭크'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 경우의 '칭크'는 셰익스피어의 표현대로 '틈'이다. 관용구를 썼으니 린의 '약점'이 무엇이냐는 의미다. 억울할 법 했지만 그는 회사 측의 징계를 수용하고 깨끗히 사과했다.
'칭크'가 동양계를 경멸하는 말로 굳어진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마침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일어나고 대륙횡단 철도가 깔려 노동력이 크게 부족했다. 수만명의 중국인들이 갑자기 몰려오자 동양인을 처음 본 백인들은 이들을 '차이나'에 빗대 '칭크'라고 놀려댔다.
ESPN의 파문에 이어 LA 한인타운에서도 비슷한 소동이 벌어졌다. 버거킹이 한인고객의 영수증에 '치니토스(Chinitos)'라는 문구를 적어 말썽이 됐다. 스페인어로 '작은 중국인'이란 뜻이어서 '칭크'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흑인을 멸시하는 '니그로'는 이제 거의 사라졌으나 '칭크'는 여전히 미국사회 일각에서 스멀대고 있다. 똑같은 단어를 놓고 셰익스피어와 미국인들은 엄청난 시각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사랑하는 여인을 '틈' 사이로 나마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냈지만 인종주의자들은 소통의 '틈'마저 막아버려 피부 색깔의 담장을 높이 쌓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칭크'는 살리되 골드러시 때의 '칭크'는 사전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캠페인이라도 펼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