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나라당은 15년 가까이 써 온 당명을 바꿨다. 보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파란색도 내던지고 ‘금기’시 돼 온 빨간색으로 당 로고를 만들었다. 야심차게 준비해 새롭게 태어난 당 이름은 ‘새누리당’. ‘누리’는 순우리말로 세상을 뜻한다. 풀어서 말하면 ‘새세상당’인 것이다.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재창조해 새세상을 열겠다는 거룩한 의미가 담긴 이름이지만 사람들은 ‘새머리당’, ‘권세누리당’, ‘똥누리당’이냐며 비웃었다. 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당 이름으로 비웃음을 산 건 새누리당만이 아니다. 지난달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이 주축이 돼 창당한 ‘국민생각’도 화제가 됐다. 국민들은 ‘권력생각’, ‘대권생각’, ‘총선생각’ 등으로 부르며 “새정치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충족시키겠다”는 당 관계자들을 무색케 만들었다.

한광옥 의원은 민주통합당 4·11총선 공천탈락에 납득할 수 없다며 탈당해 구민주계 인사들을 포섭한 뒤 지난 12일 ‘정통민주당’을 만들었다. 민주당 앞에 붙은 ‘정통’이라는 표현에서 한명숙 대표가 이끄는 ‘민주통합당’은 결국 ‘짝퉁’ 민주당에 불과하다는 뉘앙스마저 풍긴다.

2000년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12월 통합진보당으로 통합 재편되면서 11년 11개월의 역사를 마감했다. 정치권에서 ‘점포 정리식’, 혹은 ‘신장개업식’ 이합집산이 4년에 한 번꼴로 반복되다 보니, 유권자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헷갈린다.

◇민주'주인'은 누구?
미국 양당제의 주축인 공화당(Republican Party)과 민주당(Democratic Party)은 각각 150년과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은 180년이 넘었고, 노동당(Labor Party)도 100년이 넘었다.

4월 11일 19대 총선을 치르는 우리나라의 경우 주요 정당인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이 모두 창당 6개월 미만의 신생 정당이다. 만 4년을 갓 넘은 자유선진당이 그나마 역시가 긴 편이다. 60년 넘는 한국헌정사에서 이름 하나를 고수해 온 정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 진보가 갈려 권력투쟁을 한 역사가 짧다. 여당과 야당으로 갈렸지만 대부분 보수성향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수 정당인 공화당처럼 ‘공화’라는 단어를 정당명에 넣은 것은 극히 드물다. 1963년 창당해 1980년 해체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민주공화당’이다. 자신을 ‘제2의 박정희’라고 주장하는 허경영이 2008년 창당한 ‘민주공화당’도 있었다. 여당의 경우 ‘민주’, ‘자유’를 넣거나 아예 ‘한나라’, ‘한국’ 같은 탈이념적인 명칭을 사용했다.

야권은 여권보다 ‘민주’에 더 집착했다. 현재 야권의 뿌리가 된 한국민주당(1945)을 시작으로 민주국민당(1949), 민주당(1955·1991·2005), 민주한국당(1981), 신한민주당(1985), 신민주연합당(1991), 새천년민주당(2000), 통합민주당(2008), 민주통합당(2011) 등 변화무쌍한 당 이름 변경 속에서도 대부분 ‘민주’를 버리지 않았다.

진보진영도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를 썼다.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해체됐다.

◇현재 새누리당 뿌리는 3당합당이 핵심
4년에 한번씩 열리는 국회의원 총선 때마다 새 정당이 생기고, 권력 교체같은 정치적 고비마다 정당명이 자주 바뀌었다. 중간에 진보 정당이 등장하고, 대통령 선거 후보가 제3의 정당을 만든 적도 있지만 큰 줄기는 두개다.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의 신한국당과 조순 민주당 후보의 단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이 뿌리라는 게 정설이다.

현재 새누리당의 역사를 말할 때 ‘3당 합당’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이 당시 여당(민주정의당)의 주도 아래 여소야대 정국을 타파하고자 합당했다. 이때 탄생한 게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는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문민정부’를 내세웠다. 그리고 3당합당의 비판을 털어내기 위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신한국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원내 1당의 다수당으로 등극하면서 집권 여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동시에 이회창 전 총리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들 병역 문제와 이인제 후보의 탈당 후 대선 출마 등 변수가 발생했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는 1997년 11월 김영삼 대통령 탈당이후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꿔 12월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만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대표와 연대한 새정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졌다. 1997년 15대 대선으로 야당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 획득에 성공한다.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이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다시 나섰으나,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하며 2차례 연속 정권교체에 실패하게 된다.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야권 변천사…여권보다 복잡
현재 야권의 정당명 변천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1945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파 분열에 따른 탈당과 합당을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1990년 3당합당 후 야권 진영은 평화민주당(평민당) 의원들, 그리고 3당합당에 반대하며 잔류한 통일민주당 일부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당'을 만들었다.

1992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패배,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만들었다.

19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대표와 연대해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 세력을 합류시켜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새정치국민회의 간판을 바꿔단 것이다.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DJ 동교동계와 비주류 간의 쇄신 논란을 겪은 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섰다.

2008년 2월 민주당으로 명칭을 바꿔 당세를 유지하던 현재의 야권은 지난해 12월 시민사회 진영과 한국노총이 참여하는 민주통합당을 창당했다.

한편 진보진영인 통합진보당의 경우 1997년 권영길 대선 후보를 내세운 국민승리 21과, 2004년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의 혈통을 잇고 있다.

◇정당이름만 바꾸기 언제까지 계속되나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2월 당명과 관련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민주통합당이 제 1야당이라고 제대로 아는 유권자는 10명 중 7명꼴인 69.8%에 불과했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8.3%였다.

심지어 유권자의 11.9%는 제 1야당을 통합진보당으로 알고 있었다. 10명 중 3명이 제 1야당을 잘 모르는 것이다.

10명 중 3명이 제 1야당이 어느 당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알맹이는 그대로면서 ‘선거’를 위해 수시로 이름을 바꾸고 ‘이합집산’하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