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낱개 포장된 티백이 있다. 이 티백으로 차를 우려먹는다고 가정해보자. 포장을 뜯어내고 티백을 꺼내 찻잔에 건다. 자, 무의식적으로 당신이 뜯어낸 티백 포장이 직행한 곳은? 쓰레기통일 확률이 높다. 티백을 감싸는 임무를 마친 포장은 그렇게 조용히 조연(助演)의 생(生)을 다한다.
이 하찮은 일회용 티백 포장이 핀란드 아이들에게 가면 훌륭한 디자인 재료로 변신한다. 핀란드 도시 하멘린나의 아이모 예술학교 어린아이들은 버려진 탁자 위에 티백 포장 수십 장을 붙여 자신만의 탁자를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머리'가 아닌 '손'으로 디자인을 배운다. 알록달록한 색감, 방수·방습 코팅을 한 종이의 질감, 패치워크(여러 색상·무늬 조각을 잇는 작업), 재활용 디자인….
핀란드 아이들의 이 '티백 포장 탁자'가 당당히 '작품'으로 먼 한국에까지 와서 전시됐다. 다음 달 14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핀란드 디자인'전(展)에서다. 디자인과 교육, 두 키워드로 한국에서 주목받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 핀란드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안애경(쏘노안 대표)씨가 기획을 맡았다.
요즘 한국에서 핀란드 가구는 고가(高價) 디자인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비싼 디자인 작품 전시장이 아니다. 핀란드 사람이 일상에서 쓰고 입는 생활용품, 학교에서 배우는 디자인 작업을 통한 핀란드의 '디자인적 삶' 엿보기에 가깝다. 안애경씨는 "한국에서 스칸디나비아 가구들이 '상업적 럭셔리' 사치품으로 소비되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며 "핀란드 가정의 일반적인 미의 기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집·주방·거실·학교 등 실제 핀란드 가정과 사회의 여러 무대를 전시 공간으로 연출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천장에 설치 예술품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도끼·쟁기·삽부터 눈에 들어온다. '디자인 전시장에 웬 도끼?'라는 생각이 든다면 전시 의도가 성공한 거다. 연장은 400년 된 핀란드 연장 브랜드 '피스카스'의 제품들. 핀란드인들이 텃밭에서 쓰는 평범한 도구다. 피스카스는 브랜드의 상징색인 주황색을 유지한 채 도끼날 앞에 안전장치를 붙이는 방식 등으로 현대적 디자인을 계승했다. 연장은 투박하다는 고정관념도 깼다. 고된 노동을 디자인으로 생기 있게 만든, 핀란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상용품이다.
전시장 가운데엔 지붕을 일부만 덮은 나무집이 설치됐다. 핀란드 사람들이 여름철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 삶을 즐기기 위해 짓는 '여름 집'을 형상화한 것. 그 안에 핀란드인들이 즐겨 쓰는 디자인 브랜드 이딸라·아르텍의 가구·탁자·식기들이 놓여 있다. "인간·사회·환경의 이상적 조화를 담은 디자인"이라는 설명이다.
근간을 이루는 테마는 '버리기주의에 대한 거부(Against Throwawayism)'다. '오래 쓰고, 다시 쓰고, 두루 쓰는' 핀란드식 친환경 디자인을 말한다. 디자이너 미코 파카넨이 못 쓰는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동그란 1인용 소파, 우리네 재래식 화장실과 닮은 일라리 아이리칼라의 친환경 화장실이 눈길을 끈다. 전시 기간 주말마다 '트래시(trash·쓰레기) 디자인' 워크숍도 열린다.
전시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소소한 부분이 있다. 바로 전시물 아래에 깐 나무판. 한국 이삿짐센터들이 이삿짐을 옮길 때 쓰는 나무 받침대를 조립해 만든 '재활용 전시대'다. "전시 지역의 쓰레기를 활용하자"는 뜻을 담아 한국의 쓰레기를 활용해 핀란드 디자이너 헨리크 엔봄, 한국 작가 박형필, 조각가 이용덕씨가 제작했다.
한국에서 구한 탄약 상자를 붙여 만든 전시장 앞 기념품 가게의 장식대도 볼거리다. '버리기주의에 대한 거부'에 한국식으로 동참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눈여겨보시길. 관람료 일반 1만2000원, 학생 8000원.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