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탁호텔
이순우 지음|하늘재|288쪽|1만5000원
손택양저(孫擇孃邸), 손택양관저(孫澤孃官邸), 정동화부인가(貞洞花夫人家)…. 구한말 서울에서 가장 이름난 서양식 호텔이자 대표적 사교공간이었던 손탁호텔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 태생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5)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밀사였던 인물이다.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처음 서울에 들어왔다. 독어, 불어, 영어에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언어감각과 정치적 수완으로 궁중을 드나들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었고, 서울 외교가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얼마 전 '정동과 각국공사관'을 낸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구한말 손탁호텔을 비롯한 서양식 호텔에 얽힌 비화와 개화기 풍경들을 풀어낸다. 1902년 정동29번지에 들어선 손탁 호텔은 황실의 '프라이빗 호텔'로 운영됐다. 헐버트와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의 활동도 주로 손탁호텔에서 이뤄졌다. 반면 1905년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 체결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머물던 곳도 이곳이었다.
일본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측근이었던 손탁의 동향을 주시했던 모양이다. 일제시대 펴낸 '경성부사'(1934년)는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는 데 손탁과 웨베르 공사 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썼다. 또 손탁이 궁중음모에 관여했다고 적었다. "그녀에 의해 운동비를 얻은 주요한 인물들은 배일지 대한매일신보,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간했던 영국인 토마스 베델, 학교교사로 있으면서 정치운동에 몰두했던 미국인 헐버트, 전기회사장 미국인 콜브란 및 독일인 크뢰벨 부처 등이다."
◇욕실 딸린 객실 25개, 가이드·짐꾼 대기
1909년 손탁은 또 다른 서양인 호텔인 팰리스(팔레) 호텔 주인 보에르에게 호텔을 넘기고 귀국했다. '손탁 없는 손탁호텔'은 누구나 묵을 수 있는 일반 호텔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편리한 호텔. 각방에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 통역자, 가이드, 짐꾼은 즉시 대기.' 투숙객을 유치하기 위한 광고를 잇달아 신문에 실은 것도 그 때문이다. 손탁호텔은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이후 서서히 경영난에 빠졌다. 1917년 건물과 부지가 이화학당에 넘어가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됐고, 지금 그 자리엔 '이화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고종의 해외밀사' 손탁?
손탁이 결혼을 한 적이 있는지, 1909년 귀국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됐는지 구체적 확증은 없다. 일본인 기쿠치 겐조는'조선잡기'(1931년)란 책에서 손탁이 프랑스 칸에 별장을 짓고 노후를 여유있게 보내려 했으나, 재산 대부분을 러시아에 투자,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몰수됐다고 썼다. 손탁은 1925년 러시아에서 71세로 객사했다는 것이다. 기쿠치 겐조는 손탁이 추문에 휩싸이지 않고 소중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며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기쿠치의 기술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손탁이 헐버트처럼 고종이 해외에 파견한 밀사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이 일본의 보호에 전속되고, 경운궁으로부터의 밀사가 최후의 활동을 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상하이로, 페테르부르그로, 파리로, 헤이그로 분주할 무렵, 그도 역시 표연히 고국으로 떠났다. 짐작컨대, 그의 포켓 가운데는 비밀문서의 몇 조각이라도 들어있지 않았을까?"
1897년 정동 거리에 이탈리아인 '삐이노'가 운영했다는 서울호텔, 1901년 개업한 경운궁 대안문 앞 팔레호텔(프렌치호텔, 센트럴호텔 등으로도 표기), 1900년대 초에 개업한 대안문 건너편의 임페리얼 호텔, 충정로 1가 농협중앙회 앞에 있던 스테이션 호텔(애스터 하우스) 등 구한말 외국인들이 운영한 호텔과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알려진 인천의 대불호텔 이야기도 흥미롭다. 커피, 사진, 당구장, 신식결혼식, 자전거, 궁궐 관광 등 개화기 풍물들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