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얼마 전 국내 8대 제과 명장(名匠)이 운영하는 리치몬드 제과점 홍대점이 대기업 등쌀에 밀려 30년 만에 문을 닫았다. 리치몬드 제과점의 폐업 사연을 들어보니 임대료 인상이라는 대기업의 얄팍한 상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명동 같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상권(商圈)이 형성되고 장사가 된다 싶으면 어김없이 대기업 계열 프랜차이즈가 건물주에게 접근해 임대료를 대폭 올리게 하고, 견디다 못한 중소상인이 계약을 포기하면 자신들의 매장을 신규 개점하는 식으로 자리를 뺏어버린다. 기존 동네제과점 바로 옆에 자기들 가게를 열겠다고 위협해 동네제과점을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만들고 5년마다 한 번씩 매장 리뉴얼을 의무화해 비용부담을 지운다.

영세상인들은 이런 대기업의 횡포에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제품이 있더라도 대기업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동네 빵집만 해도 지난 8년간 1만4000개가 문을 닫았다. 물론 그 빈자리를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차지했다.

지금도 대형마트와 대기업 수퍼마켓(SSM)은 골목상권을 꾸준히 잠식하고 있다. 지역상인들이 강력히 반발하니까 기존 점포를 인수합병 방식으로 치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 바람에 전통시장은 최근 7년 사이 178곳이나 사라졌다. 소상공인들이 대형마트에 대해 영업제한을 하자는 것도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소상공인들의 절박함을 아직도 외면하고 있다. 그냥 남의 일이다. 얼마 전 전주시의회가 대형마트에 대해 매월 두 차례 일요일을 의무 휴업일로 지정하자 대형유통업체들은 영업의 자유와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대형마트로 인해 소상공인들이 몰락하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전국의 골목상권을 장악해 균일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 것과 대형마트에 대해 매월 두 차례 일요일 휴무를 의무화하는 것 중에 어떤 쪽이 소비자 선택권을 더 침해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전자(前者)의 경우가 소비자의 선택권과 효용을 더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시장경제의 대전제까지 훼손한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가 편리하고 깔끔한 측면도 있지만, 각 지역별 특성을 훼손해 산업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전주비빔밥이나 동래 파전, 청주 해장국 대신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맛을 내는 대형마트표(票) 피자가 우리의 입맛을 장악할 것이다. 지방 출장을 갈 때면 지역 특산물을 먹어보는 게 즐거움이었는데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토속음식에 대한 추억도 앞으로는 없어질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을 가 보면 대형마트가 도심 한가운데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차를 타고 조금 달려야 하는 시 외곽에 있어, 골목상권에 대한 침해를 최소화한다. 경제주체 간의 상생과 조화를 위해 소비자들도 일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 대기업도 알아야 할 게 있다. 대기업이 빵집·떡집·분식점·인테리어·자판기 사업 등 모든 골목 업종을 흡수하면 우리 식품 산업이 반도체나 TV 산업처럼 성장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산업의 다양성만 해칠 것이다. 또 270만명이 넘는 소상공인이 탄탄하게 버티고 있어야 내수시장이 살고 그래야 대기업도 수십만원씩 하는 고가의 휴대폰이나 TV를 팔 수 있다.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접수하면 당장은 돈이 더 들어오겠지만 우리나라의 선(善)순환 서민경제는 붕괴되고 결국은 자신들도 부메랑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지난달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로버트 라이시 전(前) 미국 노동부 장관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에 따르면 1928년과 2007년은 상위 1% 대기업에 소득이 가장 집중된 해였다. 그해 미국의 상위 1% 대기업에게 소득의 23%가 몰리면서 내수가 죽고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결국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1929년 경제대공황,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도 그런 배경에서 잉태됐다는 것이다. 270만명의 소상공인은 우리 경제의 모세혈관과 같다. 가족기업 형태의 소상공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골목상권의 몰락은 지역사회의 활기를 떨어뜨리고 국가경제를 병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