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당시 1군 사령관으로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다 강제 예편됐던 이한림(李翰林·91) 전 건설부 장관(예비역 육군 중장)이 29일 0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이 전 사령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주 신경군관학교,일본 육사 동기생이다. 그는 해방 이후 국방경비대 중대장 등을 역임하며 창군(創軍)에 기여했다.
6·25전쟁 때엔 9사단장으로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 '철의 삼각지대' 확보에 큰 공을 세워 우리 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9사단장 시절 한 번 결심하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해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수도권 북단의 전략 요충지를 책임지는 6군단장에 임명됐다. 고인은 여당의 이기붕 후보가 낙선한 당시 부통령 선거에서 엄정중립을지킨 것(6군단 이기붕 득표율 35%)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보복 인사조치로 현직 군단장이 국방대학원에 입교하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인 1960년 3·15 부정선거 때에도 상부와 기관의 집요한 협조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육사교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라"는 전화를 받은 이 전 사령관은 "육사에 계속 머물게 하거나 군복을 벗기거나, 군사령관으로 보내거나 셋 가운데 하나 외에는 응할 수 없다. 내가 정도를 걸었는데도 교장직을 해임한다면 사관생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송 총장에 맞섰다고 한다.
1960년 10월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고인은 1961년 5·16을 맞아 일본 육사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박 전 대통령과 맞서게 된다. 당초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던 이 전 사령관은 진압 과정에서 자칫 내전으로 번지면 북한의 남침을 불러올 것을 우려해 진압을 포기했다. 고인은 결국 '반혁명 주범'으로 구속돼 61년 8월 24일 강제 예편된다. 그의 체포 과정에서 쿠데타군 장교가 권총을 들이대며 '항복'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호통을 치는 기개를 보였다.
고인은 그 뒤 미국으로 추방됐다가 귀국 후 감금생활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의 회유 등에도 굴하지 않고 한동안 군사정권 동참을 거부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거듭된 간곡한 요청에 따라 1963년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을 맡아 설립에 기여했다. 이어 진해화학 사장(1968년), 건설부 장관(1969년), 관광공사 사장(1972년), 터키·호주 대사(1974~80년) 등을 지낸 뒤 모든 공직을 떠났다. 고인은 제자나 후배들의 정치 개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1980년 이후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언론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사실상의 '칩거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승훈 경수고속도로 대표이사 등 1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5월 2일 오전 7시. (02)3010-2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