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상 논설위원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킨 직후였다. '자본주의 극복'을 내세운 정당에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외국 투자회사 관계자들이 몰려왔다.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간 스탠리와 네덜란드 투자은행 ABN 암로 관계자들이 면담을 요청했다. 이 생소한 정치세력이 국회에서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다는 거였다.

이때 면담에 나선 이는 이재영 정책국장이었다. 그는 대학 중퇴 이후 비합법 노동운동을 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뒤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으로 전환했다. 이 국장은 "민노당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선 언제든지 누구라도 만나겠다"고 했다. 외국 자본을 만난 또 한 명은 송태경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왜 망했는지 다시 공부하겠다"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펴들고 씨름했던 사람이다. 송태경은 보수 언론 기자라도 정책에 대해 물어보면 2시간 이상 설명했다. 참 지독한 사람이었다.

당시 민노당 정책실에는 폐쇄적이지 않고 '진보의 현대화'를 고민했던 독종(毒種)들이 많았다. 이들은 '닥치고 반미(反美)' '닥치고 후보 단일화' 같은 이야기를 하면 코웃음을 쳤다. 이들이 만든 정책이 대형마트 규제, 상가 및 주택 임대차 보호법, 복지확대를 위한 조세개혁,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같은 것들이었다. 대형마트 규제는 8년 뒤에 빛을 봤고, 조세개혁과 복지는 지금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극복'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놨다. 법과 제도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상담하고 그 결과를 정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재영·송태경 같은 이들은 통합진보당 당권파로 불리는 NL 주사파들이 민노당을 접수하면서 하나 둘 밀려났다. 두 사람은 2008년 민노당 당권파의 종북(從北)과 패권주의 문제로 PD 평등파가 분당(分黨)했을 때 민노당을 떠났다. 이재영은 작년까지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을 하다 지금은 암 투병 중이다. 송태경은 민노당에서 하던 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고리 대부업체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작년 9월,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민노당을 떠나 진보신당을 만들었던 중심 정치인들이 진보신당을 떠났다. "꺼져가는 진보 대통합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이유였다. 이들과 유시민 대표 등 국민참여당 계열, 그리고 경선 부정과 폭력사태로 지탄받고 있는 구(舊)민노당의 NL 주사파들이 함께 만든 당이 통합진보당이다.

지금은 통합진보당이 진보의 대표 행세를 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현재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기반을 닦았던 많은 사람들은 진보당과 손을 잡지 않았다. 진보신당에 남은 김종철 부대표에게 주사파들과의 재결합을 거부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진보정당 오래하고 싶다"는 거였다. 정권교체라는 이유만으로 북한 추종 노선을 묻어두고, 복지문제에는 관심도 없는 세력과 연합하면 진보정당은 곧 사라질 것이란 설명이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5% 득표율로 낙선했다. 뭐 하러 그 고생을 하며 진보정당을 하는지 물었더니 김종철은 "아직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

한국에서 진보의 시작은 주체사상이 아니다. 숨 막히는 골방에서 여공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불쌍한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전태일이다. 진보는 다시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권이니, 야권연대니, '닥치고 뭐니' 하는 권력다툼은 그다음 일이다. 비정규직, 독거 노인, 다문화 가정, 그리고 폭압체제에서 헐벗고 있는 2400만 북한 주민들의 삶에서 다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진보가 건강해야 이에 자극받은 보수도 혁신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