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안선영. 작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녀의 에너지를 지금도 기억한다. 뭘까? 그 강하고 중독적인 에너지의 근원은. 늪처럼 빠져든, 그녀와의 ‘코드 맞는’ 인터뷰.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는 건 신기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방송처럼 각자의 개성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환경에서 누군가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방송에 함께 출연한 이후, 그녀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반 년 남짓. 성격이나 관심사가 신기하리만큼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아침,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부산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녀의 첫마디는 "아… 오늘 아침에 학원 못 갔어요"였다. 바쁜 스케줄을 쪼개 틈틈이 영어 학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어쩌다가 한 번 수업에 빠진 걸 가지고 저렇게 아쉬워하다니. 열정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녀가 꺼내든 작은 노트에는 영어 표현과 단어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부지런함에 감탄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웬 고구마를 건넨다. 아침에 먹으려고 직접 찐 건데 나중에 출출할 때 먹으라고, 방송은 체력으로 하는 거라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TV에서 늘 보아왔던 코믹하고 털털한 그녀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한 그녀와 마주하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늘 스타였다.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부산의 작은 꼬마일 때부터 오락부장만큼은 꼭 전담했던 학창시절, 그리고 연예계에 데뷔해 활동한 지난 12년의 시간까지.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는 건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고, 자연히 그녀가 속했던 집단에서 그녀는 언제나 소위 ‘튀는 존재’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어릴 때부터 잘 놀고 말 잘하는 건 뒤처지지 않았어요. 왜,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꼭 앞에 나와서 사회를 보거나 장기자랑을 하는 애들 있잖아요? 제가 바로 그런 아이였어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부끄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들에 비해 대담하고 끼가 많았던 그녀는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어머니가 제일 놀라셨죠. 평생 1등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애가 대학을 1등으로 들어가다니. 거의 잔치 분위기였어요. 얼떨결에 수석이 되고 나니까 저 스스로도 욕심이 생겼고요.”
그녀는 수석의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연기를 공부하며 틈틈이 독서했고, 동아리도 팝송 동아리에 드는 식이었다. 학교에서 공연하는 크고 작은 작품의 주인공 역할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어떤 역이든 야무지게 해내자 그녀에 대한 주변의 기대도 점점 높아졌다. 그녀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한 이윤택 연출가는 아직 학생 신분인 그녀를 극단의 객원 멤버로 영입해 무대에 세웠다. 그렇게 그녀는 닥터 리빙스턴 역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찾아온 기회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데뷔 경로부터 실력까지 주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어린 나이에 혹독한 텃세를 경험했다. 어쩌면 운명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연기자의 길. 그 현실이 상상만큼 녹록지 않다는 걸 절감하며 방황하던 무렵, 우연히 친한 선배의 유학 체험담을 듣게 됐다.
런던과 사랑에 빠지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선배를 만났어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영국이라는 곳에 대한 동경이 생기더라고요.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던 터라 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3개월만 영국으로 떠나보자고 결심했죠. 문제는 돈이었어요. 딱히 모아둔 돈도 없었고, 느닷없이 어머니께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오렌지도 팔고, 심지어 고속도로에 나가 차량광택제도 팔았죠."
단번에 홀로 영국행을 결심한 그 추진력에 더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우수 판매사원에 등극한 생활력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앞에 앉아 있는 그녀가 정말 내가 알던 TV 속 그 안선영이 맞는지 헷갈렸다. 그 괴리감만큼이나 삶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깊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영국에 도착했는데, 컬쳐쇼크(culture shock)를 겪은 거예요. 영어도 잘 못하지, 어학원에 가니까 동양인은 나 하나지, 그야말로 공황상태였죠. 울기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답답하기도 하고, 그런 내 자신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시기도 잠시. 타고난 그녀의 적응력이 서서히 빛을 발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기회를 낙심만 하다가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공연도 찾아서 보러 다니고, 통하든 안 통하든 영어도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현지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영어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정말 그땐 남자가 아니라 런던과 사랑에 빠졌어요. 이대로 연기를 쭉 공부하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결국 그녀는 당초에 계획한 3개월 일정을 늘려 1년간 영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고, 한국의 학교에도 휴학 연장 신청을 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이미 런던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IMF가 터졌다.
"청천벽력이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의 사업이 망해서 집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영국에 있겠다고 할 수가 없었죠. 뭐랄까… 패배감? 그런 기분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자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울했고, 어떻게도 해볼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절망감은 더 컸다. 꿈에 부풀어 갑작스럽게 떠났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 그녀에게 쏟아진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거기다 경제적인 압박감까지 점점 심해졌다.
"그냥 창피했어요. 고상하게 영국이니 배우니 운운할 여유도 없었고요. 남은 학기를 빨리 마치고 부산을 떠나자는 생각만 했죠."
졸업 후 그녀는 부산 KBS에서 어린이 방송 진행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서울 방송사 아나운서 공채. 다시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진행자의 꿈을 안고 그녀는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녀는 또 다시 벽에 가로막혔다.
“텃세 한번 제대로 겪었죠. 통신사 아나운서로 입사했는데 다들 학벌이 좋은 거예요. 부산도 큰 도시지만 서울에서는 어쨌든 지방인 거고, 학교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혼자가 됐죠. 텃세야 경험해봤으니 그렇다 쳐도,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화장이며 의상이며, 혼자서 다 감당하려니 너무 벅차더라고요. 그나마 겨우 얻은 일도 전부 단기 계약직이라 힘들었어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캐릭터, 안선영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형편 때문에 고민하던 중 그녀에게 개그맨 지망생인 친구가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MBC에서 곧 개그맨 공채가 시작되니 함께 지원해보지 않겠느냐고. 개그라는 분야가 생소하긴 했지만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그녀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그 길로 친구를 따라 1998년 MBC 공채 개그맨 시험에 응시했어요. 그런데 친구는 1차에서 떨어지고 저는 동상으로 합격한 거예요. 그동안 진행자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개그 소재에 진행을 넣어서 보여드렸는데, 그게 독특했나 봐요. 친구한테는 미안했지만.”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자 MC 재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시작한 개그맨 활동. 그녀는 연예 프로그램에 발탁돼 캐릭터 강한 리포터로 활약했다. 처음부터 개그맨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그계의 분위기가 많이 낯설었지만, 일에서 인정을 받으니 점점 적응되어갔다.
개그우먼 안선영으로 이름이 알려질 무렵, 그녀를 다시금 고민에 빠뜨리게 한 건 또 경제 문제였다. 즐겁게 일을 하고 있어도, 혼자의 수입으로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SBS로의 이적. 지긋지긋한 경제적 압박에, 그녀는 등 떠밀리듯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소속이 바뀌는 거잖아요.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죠. 떠나는 입장이 되니까 마음도 무겁고.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도 없이 살기 위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어려운 강단을 낸 그녀에게 거짓말처럼 행운이 따라왔다.
"개그를 하면서 원래 전공인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졌어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면서 작은 역할이라도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다가 제 이름을 건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도 하게 됐고, 여러 행사에서 MC도 맡았죠."
30대, 사춘기가 찾아오다
"요즘 사춘기가 찾아온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를 맛봤지만, 정작 내 정체성은 뭘까?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뭘까? 그런 생각. 그래서 더 열심히 뭔가를 배우려고 해요. 지금 시간을 투자해서 무언가를 배워두면, 언젠가 어디에서든 꼭 쓰일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면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배웠느냐 질문에, 벨리댄스, 기타, 디제잉, 뜨개질, 제빵, 외국어… 항목이 끊이질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다 커서야 알았어요. 그냥 다른 집처럼 아버지가 멀리 바다에 나가 계신 줄 알았죠.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어머니가… 어머니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단칸방에 살면서 리어카를 끌고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러 다니실 때도 제 옷만큼은 깨끗한 것으로 입히시고 머리도 예쁘게 묶어주시고. 나중에 사정과 형편을 알고 나서 어머니랑 약속했어요. 어머니가 화장품 팔러 다니시던 그 좋은 아파트, 제가 어머니를 꼭 그런 곳에서 살게 해드릴 거라고."
환경에 굴하지 않고 열정 하나로 부딪쳐온 그녀. 다양한 경험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고, 끊임없는 도전은 그녀를 성장하게 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는 지금도 쉬지 않고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엔 영어 공부에 푹 빠졌어요. 좀 더 정교하게 실력을 다듬고 싶어요. 나만의 경쟁력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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