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도큐멘타를 보기 위해 내가 카셀에 도착한 7일(현지시각)은 독일의 공휴일인 예수성체일이었다. 몇몇 식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모두 닫았고, 지역 주민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행사장은 전 세계에서 온 미술 관계자들로 몹시 붐볐다.
전시는 카셀 중앙역에서 시작했다. 역 안내소에 들어갔더니 안내원이 아이팟과 헤드폰을 나눠줬다. 아이팟 안에는 2008년 리노베이션을 앞둔 서울역사에서도 사운드 작업을 선보였던 응용설치미술가 커플 자넷 카디프와 조지 뷰레스 밀러의 영상작업 '구(舊) 역사 걷기 비디오(Alter Bahnhof video walk)'가 담겨 있었다. 중앙역을 촬영한 작업이었는데, 갑자기 영상 속에서 악단이 등장하여 연주를 시작했다. 마치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에서 연주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정신이 번쩍 났다. 아이팟 속 영상을 따라 중앙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눈앞의 현실과 영상 속 중앙역에서 펼쳐지는 이미지가 혼재되어 현실과 가상 사이에 모호한 혼돈에 휩싸였다. 공간을 사유하게 하는 작가 특유의 솜씨에 빠져 역사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중앙역 구 역사에는 한국 작가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품도 설치되어 있었다.
역사를 나와 길을 따라 10분 안팎으로 직진하니 주요 전시장들이 밀집해 있는 프리드리히 광장이 나타났다. 핵심 전시장 중 하나인 프리데리치아눔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텅 빈 홀이 나타났다. 열린 홀 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 자체가 바로 영국 설치미술가 라이언 간더의 작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의미가 필요해:보이지 않는 끌어당김(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ze :The invisible pull)' 이었다. 프리데리치아눔 1층의 로툰다는 이번 도큐멘타의 핵심개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치공간이었다. 이탈리아의 정물화가 모란디,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를 비롯한 작가들의 작품과 앤틱 공예품을 비롯한 여러 크고 작은 오브제들을 모아 공간을 구성했는데 이는 리서치와 다양한 사람들의 연계를 기반으로 한 이번 도큐멘타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다.
카셀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파괴된 도시를 재생시키는 방법으로 미술행사를 시작했다. 폐허를 재생시키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도큐멘타 할레에서 열린 전준호·문경원 팀의 '뉴스 프롬 노웨어(News from Nowhere)'의 메시지는 적절했다. 그들은 "종말 이후 새로 시작된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무게를 두는 모든 가치가 사라진다면, 이때 신인류가 깨닫는 미의식과 예술, 예술가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예술과 삶에 대해 고민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접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대체 예술이 뭘까? 사람들은 대체 왜 예술을 하는 걸까?' 나의 경우, 이번 전시는 타성에 빠져 있던 '예술을 보는 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각성을 안겨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