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너무 얇고 가늘어서 눈에 안 들어와요" "표지가 구겨져요" "불편하고 낯설어요"….
지난해 1월 최승호 시집 '아메바'를 낸 이후 출판사인 문학동네에는 독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시집의 글자체는 얇고 허리가 꼿꼿하게 서있는 듯한 느낌의 'SM세명조체'. 글자가 덜 또렷해 보이고, 왠지 옛날 글씨처럼 보인다. "가독성 떨어지지만 느리게, 단어 하나하나 문맥을 곱씹어 시를 읽었으면 하는 의도"였지만, 독자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문학동네는 최근 안도현 시집 '북항'(20호)까지 출간된 시인선 시리즈를 계속 이 디자인으로 내고 있다.
이런 책을 만들려면, 일반 시집보다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간다. 일단 판형. 흔히 시집 하면 가로 125㎜, 세로 205㎜ 크기를 떠올린다. 민음사가 1974년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에서 도입한 '국판 30절' 판형으로 국내 대표적 '시집 판형'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도 이 크기. 국전지(菊全紙, 636×939㎜) 한 장을 30등분했을 때 나오는 크기로, 잘려서 못쓰는 부분이 전혀 없다. 74년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당시 싼값에 시집을 보급하기 위해" 꾀를 낸 크기다.
반면 문학동네 시인선은 가로 130㎜, 세로 224㎜. 기다랗고 홀쭉하다. 버리는 부분이 생겼다. 강태형 문학동네 대표는 "과거보다 행이 길어진 요즘 시를 담기에 가장 좋은 판형"이라고 했다.
제본 방식, 표지 디자인도 다르다. 제본은 실로 꿰매는 사철(絲綴) 방식. 네 군데 업체를 거치면서 사람이 일일이 꿰매고 접고 붙였다. "기계 대신 사람이 접고 붙이는 제본이나 불친절하고 꼿꼿한 서체는 옛 선비들이 서책을 만들고 읽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이다.(김민정 문학동네 팀장)
표지 디자인은 미니멀리즘의 극치. 앞표지엔 아무 그림 없이 '문학동네시인선 020 안도현 시집 북항'이란 검은 활자 두 줄만 찍혔다. 그것도 첫 줄은 '시'에서 끝나고 '집'자는 둘째 줄로 넘어간다. 디자인을 맡은 수류산방 측은 "이 한 권이 한 편의 '시'일 수도, 시들의 모음인 '집'일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시집의 디자인 전체 콘셉트는 '속도' '편리함' 대신 '느림' '불편함'이다. 종이값에 제본비용까지 제작비는 매번 20~30%가 더 든다. 문제는 그 '비싼 파격'을 소비자도, 시인들도 좀 불편해한다는 것.
이쯤 되니 출판사도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아닌가' 할 무렵, 시인선 15호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를 펴낸 장석남 시인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예전부터 기계로 찍어낸 책이 아닌 손작업을 거쳐 하나씩 만들어진, 사람의 숨결이 담긴 시집을 한 권쯤 가지고 싶었습니다.…이 책은 제본 과정에서 조금씩 그러한 손자국이 남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더 사랑합니다." 이 편지 하나로 출판사 담당들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다. 다행히 항의전화도 요즘엔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