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파 젊은 건축가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귀국 후 적잖은 고민에 휩싸인다. 한국과 건축 선진국 사이, 건축을 대하는 민도(民度)의 차이가 너무 커서다.

건축가 염상훈(34)·오현일(34)· 박하늬(32)씨도 비슷한 고민에 처한 젊은 건축가들이다.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함께 유학하고 실무 경험을 쌓은 뒤 최근 귀국했다. 술잔 기울이며 '뉴욕에서 배운 것'과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던 세 사람은 용감해지기로 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로, 탁상공론 대신 현장 속으로 뛰어들기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 4가 역 골목 안쪽, 쓰러질 듯한 1960~70년대식 한 상가건물 옥탑에서 열리고 있는 건축전시 '0.001%-천분의 일'전(展)은 세 사람이 이렇게 의기투합해 기획한 전시다.

서울 지하철 을지로4가 역 근처 재개발 지구에 있는 낡은 건물 옥탑에서 전시‘천분의 일’을 열고 있는 박하늬·염상훈·오현일씨(왼쪽부터).

"우연히 도시의 리노베이션에 대해 얘기했어요. 불도저식으로 싹 갈아엎는 현재의 전면 재개발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공감했어요. 우리끼리 대안을 제시해보기로 했습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이들이 밝힌 전시 의도다. 유학시절 뉴욕의 하이라인 프로젝트를 보며 충격에 빠졌던 경험도 일조했다. 하이라인은 뉴욕의 오래된 화물열차용 철로를 공원으로 바꾼 프로젝트다.

이들은 "그저 곱게 양복 입고 하는 전시보다는 현실을 반영한 전시를 하기 위해" 재개발 현장에 있는 실제 건물을 전시장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을지로 재개발 구역을 선택했다. 건축학도들의 단골 연구 대상인 세운상가가 근처에 있고, 10년 넘게 재개발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슬럼화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진 왼쪽)염상훈의‘지네틱 퍼즐’. 기존의 중심 건물에 새 건물을 끼워넣어 재개발하는 아이디어. (사진 오른쪽)박하늬의‘플러그 그린’. 빈 건물의 수도관을 끌어내 도심형 텃밭을 설치하자는 안. 사진 속 파이프가 수도관이다.

과거 봉제 공장으로 쓰였던 옥탑방을 무대로 세 사람은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냈다. 박하늬씨는 '플러그 그린'이라는 작품을 통해 비어 있는 공간을 도심텃밭으로 활용하는 안을 내놨다. 염상훈씨의 '지네틱 퍼즐'은 이 지역에 100년 전 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한 제안이다. "중심축이 되는 건물은 살려두고 새로운 건물을 테트리스처럼 끼워넣어 과거와 미래가 조화를 이루게 개발하자"는 설명이다. 오현일씨는 을지로를 '제조의 메카'로 만드는 구상을 담은 아이디어 '29㎡ 인큐베이터'를 제시했다. 오씨는 "'을지로에선 탱크도 만든다'라는 우스개가 있다. 없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게 없다는 뜻이다. 기존의 건물은 그대로 둔 채 건물 사이 빈 곳에 29㎡짜리 1인용 공간을 끼워 넣어 창업기지로 삼았으면 한다"고 했다.

이들 삼총사의 꿈은 "비록 지금은 작은 목소리이지만 이런 전시들이 '나비효과'처럼 커져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