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일본 총리는 최근 2차대전 때 일본이 강제 동원한 '성노예(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쓰바라 진 국가공안위원장은 "일본군의 요청으로 위안소가 설치됐고 위안소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했던 1993년의 '고노 담화' 존폐 여부를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 자신들이 침략했던 한국·중국·대만·필리핀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다니며 일본군의 성적(性的) 배출구로 유린했던 성노예 문제는 그 피해자들이 일본의 사죄(謝罪)를 촉구하며 지금 이 시각에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일본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는 사안이다. 일본의 범죄행위를 증언하는 증인 중에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다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 활동을 강요받은 네덜란드 여성들도 있다. 그들은 70년 전 마을 들판에서 강제로 끌려가고 속임수에 걸려 넘어갔던 그 순간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그들 가운데는 일본이 자기들 죄를 자백(自白)하고 사죄하고 배상하기 전에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버티고 있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 뜻에서 일본이 피침국(被侵國)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이 반인륜적(反人倫的) 범죄는 역사의 문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일본이 1940년대 저지른 범죄를 1993년 이른바 '고노 담화'로 모호하게 시인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국가 지도자라는 정치인들이 20여년 만에 자신들의 자백을 뒤집겠다며 '고노 담화' 폐지를 들고 나오고, 과거엔 침략에 앞장서다 나중엔 그것을 미화(美化)했던 집단들이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게 요즘 일본의 사태다.
사실 '고노 담화'조차도 일본이 자신들의 죄악을 스스로 반성한 결과가 아니었다. 1940년대 개신교 목사의 딸로서 위안부 강제 연행에 쫓겨 산골로 피신했던 전(前) 이화여대 윤정옥(尹貞玉) 교수 등 한국의 연구자들이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군의 범행 현장인 동남아시아 각국을 발로 뛰며 범죄 증거를 모아 세계 여론을 움직여 일본을 추궁한 끝에 받아낸 것이었다. 비록 소수(少數)이지만 양심적 일본 연구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고, 더 이상 일본 정부가 시치미를 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노 담화가 나온 뒤에도 일본 역대 정권이 성적 노예 문제에 대해 사죄나 배상의 길로 나서는 대신 온갖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방법만을 찾자 2000년에는 세계 여성 연구자들과 사회활동가·시민단체들이 도쿄에 모여 일본의 성노예 강제 연행을 심판하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열었다. 이 법정에는 1993년 유고 전범 재판 재판장을 지낸 가브리엘 맥도널드 등 국제법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재판부는 심의를 마치고 나서 "일본이 스스로 비준했던 인신매매금지조약과 국제노동기구 조약을 위반했으며 히로히토 일왕(日王)도 위안소 설치와 운영 등을 알고 있었다"며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실제론 일본군의 성노예 강제 연행 범죄 기록은 1946년, 2차대전에서 반(反)인륜 전쟁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열린 도쿄 국제 전범 재판에 이미 제출됐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후 해군 위안소를 운용했고, 일본 특별경찰대는 거리에서 부인들을 끌고 가 강제로 위안소에 넣었다"는 일본군의 증언 자료를 제출했다. 재판에 참여했던 중국도 "일본군이 중국 구이린 지역에서 여공(女工)을 모집한다는 거짓말로 부녀자를 꾀어 군대에서 추악한 일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1992년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교수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모집할 때 유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담긴 1938년 일본 육군성 작성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공개했다. 이를 뒷받침할 일본인의 증언도 속속 이어졌다. 1942년부터 3년 동안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일했던 요시다 세이지는 "육군성은 '성전을 위해 대의멸친하는 시책'이라고 이름 붙인 극비 통첩을 발부해 조선 여자들을 위안부로 동원했다"며 "1943년 5월 17일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제주도에 도착해 '처녀 사냥'에 나섰다"고 증언했다. 그는 "위안부에 관한 일은 모두 군사기밀로 분류됐다"고 했다.
세계가 하나로 묶인 지금 일본의 성노예 강제 연행 범죄는 이미 현대사의 가장 추악한 역사적 사실로 공인(公認)됐다. 미국 하원과 유럽의회는 2007년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징용했다"고 규탄했다. 네덜란드 의회는 "일본은 강제 성매매에 일본군이 관여했던 것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에선 지금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성노예 범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보고서가 나왔다. 일본의 성노예 범죄를 다룬 유엔 인권이사회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보고서가 1996년과 2003년에 제출됐고, 인권소위 맥두걸 특별보고관도 1998년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1994년 이후 4회에 걸쳐 일본에 성노예 책임을 물었고 고문방지위원회는 2007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는 2008년에 일본에 성노예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노다 일본 총리가 일본의 범죄를 증언하고 기록하고 추궁하고 심판해온 세계와 맞설 자신이 있다면 올해 유엔 총회에 출석해 "2차대전 때 일본군에는 성노예가 없었다"고 연설해보라. 그 현장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나오는가 아니면 야유 소리가 터지는가를 실제 체험해보고 그 결과를 일본 국민에게 솔직하게 보고해야 한다.
입력 2012.08.2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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