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 마련하는 데 네가 보탠 게 뭐 있어? 내 집이니까 네가 나가! 몸만 나가!"
서울 서초동 이혼 전문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온 신부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신랑에게 들었다는 폭언이다. '집은 남자가 해온다'는 통념에 밀려 무리해서 신혼집을 산 신랑이 '아내가 해온 혼수와 예단이 성에 안 찬다'는 이유로 폭발한 사례였다. 소송을 담당한 A(48) 변호사는 "소형 주택 집값이 뛰면서 최근 수년간 이런 사건이 부쩍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이 소송의 내막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갈등의 뿌리에는 '집은 원래 남자가 책임지는 것'이라는 관행과 인식이 있다. 언제부터 이런 관행이 생긴 것일까? 정말로 우리 조상은 남자가 집을 책임지면서 살아왔을까? 전문가들은 "유교 경전은 물론 어떤 역사책에도 그런 규범은 없다"고 했다.
고구려부터 조선 전기(前期)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결혼식을 치른 뒤 상당 기간 처가살이를 했다. 처가에 들어가 살거나 장인·장모가 처가 근처에 마련해준 집에서 지내며 아이들이 열 살 안팎 될 때까지 키운 뒤 온 가족이 그동안 사용한 세간을 지니고 남편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 전기까지는 딸에게도 공평하게 재산을 분배했기 때문에 신부의 부모가 넉넉하게 살 경우에는 딸 부부가 시댁으로 돌아갈 때 논밭을 떼어주고 하인을 딸려 보냈다. 결혼 문화 전문가인 조희선 성균관대 교수는 "부덕(婦德)의 화신인 신사임당도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가부장제가 강화됐지만 정부가 아무리 '신부 집 대신 신랑 집에서 식을 올리라'고 해도 백성이 듣지 않았다. 결국 혼례식 자체는 예전처럼 신부 집에서 치르되, 식만 치르고 곧 시댁에 들어가는 쪽으로 풍습이 변했다. 장남 부부는 나이 든 부모를 모시고 살고, 차남 이하는 결혼해서 몇년간 부모와 함께 살다가 집성촌 안에 작은 집을 지어서 분가했다.
이 모든 게 확 바뀐 게 1960~70년대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국민 대다수가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자식은 도시에서 직장 다니게 됐다. 부모와 자식이 한 도시에 살더라도 결혼식 올린 뒤 일정 기간 부모와 함께 살다가 분가하는 풍속이 생겼다. 이후 IMF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부모·자식 모두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따로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문제는 모든 게 변했는데 '신혼집 마련은 남자 몫'이라는 인식만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결혼 문화 전문가인 박혜인 계명대 교수는 "유교의 영향이 막강했던 조선시대에도 '가가례(家家禮·집마다 예의범절이 다르다는 뜻)'라고 해서 양가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관혼상제를 치렀지 지금처럼 획일적인 기준을 들이대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신랑이 신혼집을 마련하고, 신부가 그 답례로 현금(집값 10~20%)과 각종 명품을 시댁에 보내는 게 마치 '공식'처럼 굳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최근 10여년 사이에 웨딩업계가 만들어낸 폐단일 뿐 전통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조 교수도 "아들 가진 부모들이 사돈·며느리 눈치 보느라 또는 아들이 기(氣) 죽을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집값을 대주는데 아들 신혼집 마련해주는 건 남자의 체면이나 집안의 '뼈대'와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사회 변화에 맞춰 양가가 형편에 맞게 집값을 분담하는 게 우리 전통에도 맞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