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강간)과 추행, 간통 등 성범죄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피해자의 뜻에 맡기는 친고죄(親告罪) 규정은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있었다. 수사기관이 수사는 할 수 있지만 처벌은 피해자의 뜻에 따르는 반의사(反意思)불벌죄와 달리 친고죄는 수사행위 자체도 피해자의 의사에 좌우된다.

성범죄를 친고죄로 한 이유는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우려해서다. 과거엔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프라이버시에 큰 타격이라고 보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23일 방송에 출연해서 "과거 강간죄를 부녀자 개인에 대한 어떤 신체적·정신적 범죄로 이해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친고죄 유지론자들은 지금도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신분이 사실상 공개되면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범죄를 여성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공동체 차원의 흉악범죄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면서 친고죄 폐지론이 힘을 얻고 있다. 법 개정 과정에서 부분적인 친고죄 폐지도 이뤄졌다.

1994년 시행된 성폭력 특별법은 특수강간(2인 이상 범행·흉기소지 강간), 친족 간의 강간, 신체장애인 상대 강간죄는 친고죄를 폐지했다. 1997년에는 아동(13세 미만) 대상 성범죄,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성범죄도 친고죄에서 제외됐다.

청소년(14~18세)에 대한 성범죄는 2008년에 '반의사불벌죄'(고소 없이 수사가 가능하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원해야 처벌)로 바뀌었고, 반의사불벌죄도 폐지하자는 법이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다. 성인 대상 성범죄도 친고죄에서 배제하자는 법률안도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돼 있다.

성인 상대 성범죄에 대해서도 친고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발언은 법률의 최종 해석기관인 사법부가 성범죄를 피해자 개인 문제가 아닌 반(反)사회적 범죄로 규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성범죄가 '친고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처벌받는 성범죄자의 수가 늘고 법원의 형량도 더 세질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