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주말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지난달 9일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이 중소기업 회장 아들과 결혼식 올리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극 중에서 신부는 평범한 레스토랑 직원이다. 신랑도 부잣집 아들이지만 사치와 허세를 모르는 건실한 청년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런 설정과 달리, 대다수 중산층·서민 시청자들이 보기에 두 사람의 예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결혼식 장면에서 신부는 한 벌에 4000만~1억원 하는 스페인 명품 브랜드 웨딩드레스를 입고, 크리스털로 장식한 부케를 들었다. 식장은 하루 결혼식 올리는 데 5000만원 안팎이 드는 서울 강남의 고급 예식장이었다(하객 500명 기준). 신랑·신부 친구들 대신 부모의 지인이 식장을 메웠다. 그동안 사회문제가 된 '고비용 결혼식'의 전형이었다.
드라마 내용은 마치 두 사람이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흘러갔지만, 이 장면이 나간 뒤 인터넷에는 "아름다운 자태" "화려한 부케 눈길" 같은 기사가 우르르 떴다. 네티즌들은 "나도 저 드레스 한번 입어보고 싶다" "보석 박힌 부케 비쌀 것 같지만 예뻐…. 예물로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 댓글을 잇달아 달았다.
이 드라마뿐 아니었다. 취재팀이 2000년 이후 공중파 3사에서 방영된 드라마(사극 제외) 중 시청률이 높은 인기 드라마를 추려 결혼식 장면을 분석해보니, 두 편 중 한 편꼴로 천편일률적인 결혼식이 등장했다(48편 중 24편·AGB닐슨미디어리서치·TNmS 조사). 주인공이 명품을 입고 서울 시내 특1급 호텔에서 식을 올리는 장면도 수없이 나왔다.
평범한 족발집 대가족을 다룬 KBS 2TV 드라마 '며느리전성시대'(2007년)의 경우, 며느리 등 3명이 모두 결혼식 때 명품 드레스를 입었다.
11일 조선일보 편집국에 모인 전문가들은 "외국 영화·드라마에는 개성 있고 감동적인 결혼식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결혼식을 보여주면서 호화 결혼식까지 부추긴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호화 결혼식을 다룬 드라마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된다"고 했다.
이성미 결혼정보회사 선우 커플매니저는 "현실 속 고객 중에도 드라마처럼 결혼식 올리길 꿈꾸는 사람이 많다"면서 "방송이 결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작은 결혼식을 아름답게 조명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일부 드라마 주인공처럼 서울 시내 특1급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면 하루 8000만~1억원이 든다(하객 500명 기준). 하지만 드라마에는 그런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그 돈을 모으는 과정도 없다.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저런 게 멋진 결혼식이구나'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현실에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승수 서울예대 교수(전 MBC 드라마국장)는 "방송사들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3각 관계도 모자라 4각 관계, 5각 관계를 만들어가며 경쟁적으로 극단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결혼식 장면은 그렇게 쌓인 갈등과 대립이 해소되는 클라이맥스라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인데, 바로 그 장면에서 호화 결혼식이 나온다.
김 교수는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결혼식을 보면서 자꾸만 눈높이가 높아지고, 방송사들은 그런 시청자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음 드라마에선 더 화려한 결혼식을 보여준다"고 했다.
강정원 서울대 교수(민속학)는 "드라마가 끝나도, 드라마 속 호화 결혼식이 남긴 환상은 시청자들 머릿속에 그대로 남는다"고 했다. 그런 환상을 다시 한 번 증폭시키는 게 연예정 보프로그램과 인터넷 매체다. 연예인 상당수가 드라마에서 호화 결혼식을 올린 데 이어 현실에서도 협찬을 받아 화려하게 결혼식을 치른다. 수많은 연예정보 프로그램이 스타의 결혼식을 무비판적으로 온 국민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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