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지난여름, 저는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책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찍어온 들꽃 사진을 뽑아 정리하고 자료를 뒤져가며 설명을 쓰고 고치고 다시 썼지요.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산행길 우리 들꽃'이란 이름의 2013년도 달력입니다. 2009년도 달력부터 매년 만들었으니 벌써 5집이네요. 한 달에 한 장씩 넘기는 월력(月曆)이 아니라 매주 한 장씩 넘기는 주력(週曆)입니다. 달력에는 그 주간에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을 담았지요. 모두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제 별명이 '꽃남' 입니다.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했습니다. 집 마당에서 누님이 화단을 가꿨는데 그때 봤던 봉숭아꽃·맨드라미·채송화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고 나면 귀가 선물용으로 꽃다발을 사주곤 합니다. 첫 직장 상사한테 배운 취미랍니다. 신입사원 시절, 인상 험악한 상사가 회식하고 헤어질 무렵에 꽃을 파는 리어카로 가더니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빼앗았으니 이걸로 면피해"라면서 꽃을 한 다발씩 안겨주는 거였습니다.
저는 홍보맨입니다.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서 시작해 1990년 옮긴 대한항공에서 2008년 8월 정년 때까지 줄곧 홍보 일만 했습니다. 정년 이후에도 임금피크제 직원으로 같은 업무를 더 하고 작년 말에 은퇴했어요. 회사와 그룹 사보, 기내 신문 발간 업무를 총괄했습니다. 모두 합쳐 딱 15일 모자라는 35년 동안 홍보의 A부터 Z까지 두루 익혔지요. 지금은 황사 발생 방지를 위해 몽골 사막에 식림사업을 펼치는 '푸른아시아'란 단체에서 홍보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몽골 울란바토르 인근 바가노르 사막에 가서 2005년에 심어놓은 나무들의 생장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7년 전 식림하러 갈 때만 해도 이런 황무지에서 나무들이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심는 정성과 가꾸는 노력이 합쳐져 푸른 숲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고 할까요. 이번에 거기서 찍어온 사진을 골라 2014년도 환경 달력을 만들 계획입니다.
산에 올라 들꽃 사진을 찍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 주말마다 카메라를 들고 전국 각지의 산을 오르내리며 꽃을 찍습니다. 8년 전, 산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함께 들꽃 사진을 찍기 시작해 이제는 혼자 가는 게 더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엔 무슨 꽃인지도 모르면서 찍었고, 찍은 사진을 놓고 자료를 찾아가며 이름을 익혔어요. 야생화 사진작가인 김정명 선생님한테도 배우고, 도감과 교본을 사서 읽으면서 공부했습니다.
예쁜 들꽃 사진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기 시작했지요. 몇 줄 소감을 적고 사진을 첨부해서 매주 한 편씩 '꽃남 한승국의 주간 들꽃메일'이란 제목으로 발송합니다. 받아보는 분만 1000명이 넘어요. 우리 들꽃을 좋아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해외에 사는 분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묘약(妙藥)이라면서 고마워하죠. '월간 산'에도 '꽃남 한승국의 조곤조곤 산행기'란 칼럼을 3년째 연재하고 있어요.
아마추어인 제가 사진집을 겸한 달력까지 만들게 된 것도 좀 더 많은 사람과 '들꽃 사랑'을 공유하고 싶어서입니다. 2008년 정년 퇴임식 때 뭔가 의미 있는 걸 후배들에게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찍은 사진 중에 고르고 골라서 처음으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화사한 원예종보다는 산과 들에 피어 있는 꽃들을 좋아합니다. 우리 들꽃은 외래종처럼 크거나 색깔이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런 소박함에 마음이 더 끌려요. 오래 봐도 싫증 나지 않거든요. 은근한 향기도 일품이지요. 게다가 약효까지 지닌 꽃들도 많은데, 함부로 남획돼 멸종 위기에 처한 종도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귀한 꽃을 만날 때는 눈물이 날 정도예요. 같은 등산로에서도 올라갈 땐 안 보였던 꽃이 내려올 때 보이기도 하고, 이미 봤던 꽃도 빛이 다르면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게 참 신기하죠. 지난봄 경기도 가평 화야산에서 삼색병꽃나무를 찍을 때가 그랬습니다. 오전에 올라갈 땐 못 봤는데 오후에 내려오면서 보니 석양을 받은 꽃이 선녀들의 화관(花冠)처럼 빛나고 있었어요. "와~" 하면서 찰칵찰칵 찍어댔죠.
그동안 제가 찍은 야생화가 400여종이나 됩니다. 계절마다 만나는 꽃이 다릅니다. 봄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을 뚫고 피는 복수초를 만날 수 있어요. 변산바람꽃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입니다. 어느 해 3월이던가, 계곡에 핀 변산바람꽃을 찍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계곡물에 빠져 흠뻑 젖은 적도 있었습니다. 4~5월에 피는 작은 꽃들은 함축미의 결정판이죠. 깽깽이풀, 회리바람꽃, 얼레지…. 이름도 정말 예쁘지 않나요? 가을에 피는 바위구절초는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강원 북부 이상 지역의 고산지대 중턱에서 핍니다. 연한 홍색이나 흰색 꽃을 한 송이씩 피우는데, 마치 파란 가을 하늘에 뜬 흰 구름 한 점이 숲 속으로 내려앉은 것 같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찍으니 화낼 일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카메라에 담아온 꽃을 보면 금세 순화가 됩니다. 이렇게 꽃에서 얻은 긍정 에너지를 홍보 일에 쏟아붓지요.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