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친한파(親韓派)'를 자처하는 일본 정치인이나 학자·언론인은 한·일 관계에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친한파 언론인의 대표 격인 일본 아사히신문의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주필이 얼마 전 한 국내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읽고도 '겉돌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와카미야 주필은 그 칼럼에서 천황(일왕)이 한국 대통령들에게 '유감' 표명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평가하면서 "(천황은) 사죄의 자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천황은 스스로의 발언을 비판받아도 반론할 자유가 없다. 일본에서 천황 비판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천황이 신성한 존재여서라기보다 비판에 대해 반론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천황(天皇)'에게 사죄의 자유는 물론 반론의 자유가 없다니, 무슨 기괴한 주장인가. '천황'이라는 신성불가침을 건드린 출판물과 언론에 대한 테러의 역사를 살펴봐도 와카미야 주필의 주장은 인식의 차이를 떠나 사실 호도에 가까운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일본에서 천황 비판이 금기시된 결정적 계기로 1960년 '풍류몽담(風流夢譚) 사건'을 꼽는다. 천황이 처형되는 장면을 묘사한 소설 '풍류몽담'에 분노한 우익이 이 소설을 실은 잡지사 사장 집에 침입해 가정부를 살해하고 사장 부인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 언론은 천황 보도에 대한 자율 규제를 관례화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984년에는 천황을 패러디한 그림을 잡지에 게재한 작가가 테러를 당해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잡지 편집장은 길거리에서 우익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
'불경(不敬) 잡지' '불경 언론인'으로 찍히면 예외 없이 습격을 받았다. 해당 잡지에 광고를 게재한 기업들은 광고 중단 협박을 받았고, 광고 취소가 잇따랐다. 왕실 관련 기사에서 오·탈자가 나거나 사진의 좌우를 잘못 실었다가 출판물이나 잡지를 전량 회수해 폐기하는 일이 벌어져도 쉬쉬하고 넘어가는 게 다반사였다. 그것이 알려지면 우익이 쳐들어오고 소동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천황 직속인 '궁내청'이라는 막강한 기관을 동원해 '불경 기사'는 철저히 통제된다.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는 지난 2007년 호주 언론인이 일본 황태자비의 황실 생활을 다룬 책 '프린세스 마사코'의 일본어판 출판을 앞두고 궁내청의 압력을 받아 돌연 출판을 중단했다. 1990년에는 한 주간지가 황태자 결혼 문제를 다뤘다가 궁내청이 사실무근이라며 항의하자 편집장은 전격 경질됐고 사장은 궁내청을 사죄 방문했다. 1993년 주간문춘이 황실 내부 사정을 폭로한 기사를 게재했다가 미치코 황후가 직접 "사실이 아닌 보도로 큰 슬픔과 당혹감을 느꼈다"며 반박하자 문예춘추사 사장 집에 권총을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이 영국과 네덜란드처럼 입헌군주제 국가라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다. 영국에선 군주제가 필요한지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고 '왕실이 필요 없다'는 응답이 과반수를 차지했다는 결과가 보도된다. 하지만 일본에선 왕실의 존재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터부시된다. 일본은 아직 근대국가가 아니라 '전(前)근대국가=신(神)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사과하라"는 요구가 통할 리 만무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천황(일왕) 사과 발언' 이후 '친한파' 일본인들의 화난 표정과 표변한 모습을 보면서 "한·일 관계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