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화전민의 딸로 태어난 왕수복은 10대 초반 먹고살기 위해 평양 권번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열여섯이던 1933년 취입한 레코드가 120만장이 팔리면서 당대 최고 스타 가수로 떠오른다. 맑고 고운 서양식 창법으로 부른 '아리랑'은 경성 방송국 전파를 타고 일본까지 방송돼 현해탄 양쪽에서 '아리랑' 대표가수로도 널리 알려졌다. 해방 이후엔 북한에서 민족음악 발전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남쪽에선 유성기 음반을 통해 목소리만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가수왕' 왕수복(1917~2003)이 1955년 9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북한 공연예술단의 일원으로 아리랑을 독창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왕수복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실황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임영상 한국외대 교수가 카자흐스탄 국립영상물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한 이 영상은 9분 분량으로 알마티 오페라극장 공연 실황을 기록한 것이다.
왕수복은 가야금과 해금 반주에 맞춰 서양식 창법으로 아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왕수복은 일제강점기 신(新)민요로 대중을 사로잡은 가수였지만, 무대에서 실제로 어떻게 공연했는지는 영상이 없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양기생 출신 왕수복은 대중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한 1930년대 조선의 스타였다. 경성방송국은 1934년 왕수복을 출연시켜, "옥반을 굴러가는 구슬 소리가티 맑고도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의 귀여운 노래가락"(조선일보 1934년 1월 8일자)을 일본에까지 내보냈다. 1935년 잡지 '삼천리'의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왕수복은 고복수·이난영을 제치고 전체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왕수복은 인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1936년 기생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이탈리아 성악가로부터 성악을 배우고 메조소프라노로 활동했다. 국악 평론가 윤중강씨는 "왕수복은 '최승희가 조선의 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살리고 싶다'고 말할 만큼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했다.
연애도 떠들썩하게 했다. 소설가 이효석의 연인으로 2년여 사귀며 그의 임종을 지켰고, 1947년 시인 노천명 약혼자였던 김광진 보성전문학교 교수와 결혼했다. 월북한 김광진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왕수복은 북한의 국립묘지 격인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은 남쪽에선 잊힌 스타였으나, 2006년 '평양기생 왕수복, 10대 가수 여왕 되다' 등 그의 일생을 다룬 책이 출간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북한 공연예술단 영상엔 북한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장구춤을 추는 장면도 포함돼 있다. 안성희가 1955년 북한 공연예술단 대표로 소련을 순회했다는 것은 최승희 춤이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계승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왕수복과 안성희의 공연 영상은 문화재청이 1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여는 'CIS 고려인 공동체 무형유산전승실태 성과 발표회'에서 소개된다. (042)481-4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