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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의 지식

서동욱·김행숙·정영훈·강유정 편저 | 민음사|440쪽|1만8000원

제목부터 오만하다. 440쪽 책 한 권으로 '한평생의 지식'이라니. 깊이도 얕아 보인다. 36명이 주제별로 5쪽 안팎씩 써낸 글을 묶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지식의 최신 담론'이라 참칭하다니. 하지만 천천히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마음의 조건, 돈과 노동, 놀이와 예술, 재앙과 노년의 삶, 죽음과 종말에 이르는 단락 구성은 족히 '한평생의 지식'이라 할 만하다. 정독해 보니 글의 짧음도 '얕음'이 아니라 '간결과 응축'의 결과였던 것.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그저 백과사전식 지식의 모둠이 아니라 최신 정보와 반성적 사색의 교직물이라는 데 있다(물론 글마다 약간씩의 편차는 있다).

가령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도킨스가 말한 '밈(meme)' 개념의 '혁명성'을 설명하면서 '싸이의 말춤 선풍'과 연결짓는다. 밈이란 유전자 외에 인간 행동을 조종하는 새로운 복제자. 이른바 문화 유전자다. 장 교수에 따르면, 말춤의 매력은 쉽고 단순함에 있다. 하지만 쉽기로 말하면 '막춤'은 어떤가. 그냥 막춤과 싸이의 말춤은 어떻게 다른가. 막춤의 어려움과 말춤의 인기를 그림으로 설명한다. 누군가에게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게 한 후 그 뒷사람들에게 차례로 앞사람을 따라 그리게 해 보라. 아마 스무 번째쯤 가면 첫 그림과는 딴판이 돼 있을 것이다. 반면 첫 그림이 별 모양이었다고 치자. 그 경우엔 끝 사람도 여전히 별 모양일 가능성이 높다. 그냥 따라 그리더라도 어떤 특정 모양을 인식했을 때는 '복제의 충실도'가 훨씬 높아진 결과다. 막춤이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이라면 말춤은 별 모양 그림에 해당한다. 싸이의 춤이 전 세계인의 뇌와 몸을 통해 계속 복제된 주된 이유는 춤이 그저 '쉬워서'라기보다 말동작을 본뜬 춤의 의미(지침)가 보편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 밈으로 종교와 이념의 확산까지 풀어내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각 글들은 현대 지식의 현장이 첨단 과학과 인문학이 조우하는 자리임을 드러낸다. IT평론가 김국현이 최근 총아로 떠오른 '클라우드'(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저장·제공 서비스)를 두고 '인간 사유의 새로운 순환계통', '신체화된 조직'으로 해석해 낼 때 특히 그렇다.

철학자 강신주는 '한국인은 왜 죽도록 일만 하는가'를 놓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일만 했던 오랜 독재의 경험,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일자리 자체를 지상의 가치로 만들었던 산업자본의 압력'두 열쇠로 풀어내고, 하지현 건국대 정신과 교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중독을 두고 "인간에게서 분리해낼 수 있는 독립적 병리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과 환경 적응을 위한 생리적 시스템이 잘못 작동한 결과"라며 '욕망의 결핍'을 읽어낸다.

정치학 박사이자 프로 바둑 기사인 문용직은 '형상과 이미지의 놀이'로서 3000년을 이어왔던 바둑이 디지털 시대에 와서 '제의성(祭儀性)'을 잃고, '승부의 이야기'가 아닌 단순 '승부'로 전락했다고 탄식한다.

노년과 죽음, 종말에 대한 성찰로 안배한 마지막 장도 돋보인다. "인생에서 노화의 가르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바로 우리의 의지 또는 능력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타자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이 성립한다. 주체의 능력이란 이렇게 노화에 수동적으로 노출된 삶 위에 실려 흘러가며 잠시 반짝거리는, 변덕스러워 믿을 수 없는 햇빛의 각도 같은 것…."(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늙어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소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싶을 때 뒤이어 김정한 한림대 의대 교수의 '불멸, 생명 연장의 꿈'이 균형을 잡는다.

'지구 멸망을 앞둔 하루'를 그려낸 소설가 김미월의 가상 콩트는 '건빵 속 별사탕' 같은 별미다. 그 밖에 노동과 여가, 문학과 예술, 환경과 재난, 게임과 스포츠 등 삶의 영역을 두루두루 짚었고, 뜻밖의 필자인 화산학자 소원주, 프로 갬블러 출신 방송인 이태혁도 가세한다.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은 두 겹이다. 모처럼 영양가 높은 책을 수월하게 읽은 데서 오는 것. 그리고 우리 출판계도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기획 공저를 내놓을 만한 수준에 있구나 확인하는 데서 오는 반가움. 한 해를 마감하며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지적 현주소를 돌아볼 만한 책으로 주저 없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