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 목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하자 성우 이선(40)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우히히히. 안녕, 친구들." 순간 멀찍이 떨어져 있던 꼬마들이 흥분하며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뽀로로가 있나 봐"라고 외쳤다. 짧지만 강렬하게 '뽀통령(뽀로로+대통령)'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선은 올해 탄생 10주년을 맞은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에 첫 방송 때부터 빠지지 않고 출연했던 '뽀로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24일 개봉 예정인 첫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에서도 뽀로로의 목소리를 책임졌다. 훤칠하고 늘씬한 몸에 작은 얼굴….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로로와 180도 정반대 모양새를 한 그를 4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에서 만났다. 1992년 KBS 성우로 뽑힌 뒤 앤젤리나 졸리, 캐머런 디아즈 등 섹스 심볼들의 더빙을 도맡아 해온 그에게 10년 전 뽀로로 첫 녹음 시절을 떠올려달라고 했다.

10년간 뽀로로 목소리를 연기해온 성우 이선이 4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뽀로로 인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은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애써 만들어도 빛 못 보고 푸대접받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상황에서 만난 뽀로로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일본 애니메이션과 견줘 보석처럼 빛났어요. 그림 색깔도 예뻤지만 펭귄과 북극곰, 벌새, 여우 등이 한마을에서 산다는 설정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대한 선입관을 다 허물어뜨렸죠."

하지만 꼬마 펭귄 목소리 연기는 다른 어느 녹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노동이었단다. "어떤 캐릭터보다도 힘을 많이 써요. 두성(頭聲)을 많이 짜내 소리를 코에 걸듯이 내고 성대는 최대한 좁혀야 해요. 응응응응~잉잉잉잉. 이렇게요. 10년을 이러다 보니 저도 펭귄이 된 것 같아요(웃음). 동물원이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펭귄이 나오면 끝까지 꼭 봐요. 천적에 잡히기라도 하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개봉을 앞둔 극장판 녹음은 그런 TV판 녹음보다도 더 힘들었단다. "뽀로로가 10년 동안 살던 숲을 떠나 바깥세상에서 썰매 타고 점프하거든요. 우와아아, 아아아아아, 소리를 계속 지르다 보니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든 거예요. 하하하."

그는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응원 메시지를 녹음하는 등 뽀로로 목소리 재능 기부 활동도 벌여왔다. 특히 최근 TV조선 토크쇼 '스토리잡스'에 나와 2008년 10월 톱스타 최진실이 세상을 뜬 뒤 당시 유치원생 딸에게 며칠간 매일 뽀로로 목소리로 전화해 이야기를 나눈 일을 소개해 화제가 됐다. "역시 고인이 된 최진실씨의 동생 진영씨와 친분이 있었는데 '뽀로로가 돼 조카를 위로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하루만 하려고 한 게 20일 넘게 이어졌어요." 그는 "울음을 참는 게 힘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아이는 뽀로로도 자기 엄마처럼 연예인이라고 믿어 '촬영 들어가니?'라고 묻기도 했어요. 어떤 날은 자기 인형 친구들을 전화기 앞에 가지고 나와 수화기 너머로 인사시켜 주기도 했죠. 한번은 '뽀로로 넌 엄마가 있니?'라 묻고는 '난 엄마가 없어. 하늘나라로 가셨대. 그래도 괜찮아 보고 싶을 땐 사진을 보면 되니까'라고 말하더라고요. 저도, 통화를 지켜보던 우리 엄마도 눈물범벅이 됐어요."

6일 최진실의 전 남편인 조성민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뒤 전화로 이선씨를 다시 만났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온종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지금은 경황이 없어서…. 이젠 뽀로로가 살아 있다고 믿을 만한 나이도 아니라서 다시 전화로 연기를 할 수도 없고요. 그저 '두 손 꽉 쥐고 힘내라'고 텔레파시만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대학(서울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한 그는 "목소리가 아닌 나 자신을 보이는 연기에도 욕심이 있다"고 했다. 2006년부터 매년 한두 차례 연극 무대에 섰고, 18~20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문화재단 공연장에서 열리는 연극 '당신이 그립습니다'에도 출연한다. "목소리 연기와 진짜 몸으로 연기하는 건 거리가 있으니까 항상 연기 갈증을 느껴왔어요. 그걸 풀려는 도전은 계속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