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작가들에게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만 있던 원고를 처음 쓰려고 할 때 별 수 없이 대면하게 되는 하얀 여백, 그리고 컴퓨터 위에 고장 난 지시등처럼 깜박이는 커서(cursor). 그에게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흰 백지를 보는 일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하지만 '가장' 두렵고 '진짜로' 두려운 순간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잘못 누른 키 하나 때문에 몇날 며칠을 공들여 쓴 원고가 허공에 날아가는 순간. 저장키를 제대로 누르지 않은 실수 때문에 몇 달, 몇 년을 쓴 원고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때. 누군가 내가 쓴 원고를 잃어버렸을 때. 그 원고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찰나'와 '영감'의 소산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때!
작가는 그런 공포의 순간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자신의 노트북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한 소설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모두 탄식을 내질렀던 건 그것이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원고를 지켜줄 USB와 웹 하드의 축복은 그들에게 멀기만 하다. 잃어버릴 원고는 어느 순간 정말로 사라져버리니까 말이다.
1922년 스위스 로잔에 취재를 갔던 소설가 헤밍웨이는 아내에게 파리 집에 있는 자신의 작품 초고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헤밍웨이를 만나러 가던 길, 파리의 리옹역에서 헤밍웨이의 초고들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은 훗날 많은 사람의 영감을 자극했다.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것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을 적실 세기의 '걸작'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스토리'는 헤밍웨이의 잃어버린 원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소설가 지망생 로리는 사랑하는 연인 도라와 브루클린에서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출판사에 매번 자신의 원고를 퇴짜 맞는다. 뉴욕에서라면 그 어떤 예외도 그저 일상일 수 있다는 전언처럼 그의 뉴욕 생활은 만만치 않다. 실패한 예술가들의 도시이기도 한 뉴욕을 떠나 그는 도라와 파리로 신혼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그는 파리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서류 가방 하나를 사게 되는데, 브루클린으로 돌아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느 날, 가방 속에서 우연히 낡은 원고 뭉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낡은 원고 속에는 1944년 파리를 배경으로 전쟁 후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잃었던 통한의 과정을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 있다. 로리는 밤새 이 원고에 빠져든다. '더 스토리'는 젊고 패기에 차 있던 젊은 작가 지망생이 어째서 이 오래된 이야기를 '오자'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겼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타인의 언어를 훔치고 나서야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 갖게 되는 양심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의 또 다른 이야기라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는 사실 유명 소설가인 클레이가 낭독하는 자신의 소설 속 소설이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액자 구조지만 이야기 자체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타인의 이야기를 훔치고, 그 이야기를 직접 썼던 노인이 그 앞에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남자가 진실을 밝히려던 순간, 노인이 병들어 죽는다는 얘기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낸 클레이는 자신을 흠모해 낭독회에 쫓아온 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게 다야. 노인이 죽으면서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지. 도덕도 없고, 인과응보도 없고, 지식에 대한 놀라운 발견도 없어.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인생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더 잘 살아간다는 것 말이지."
이 영화의 원제는 'The words'이다. 죽기 직전, 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훔친 로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아내가 아니라 내 단어를 더 사랑한 것에 있었다고. 헤밍웨이의 초고를 잃어버린 그의 아내는 어땠을까. 그때, 헤밍웨이는 어떤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봤을까.
런던의 지하철 파업으로 히스로 공항의 비행기를 놓치게 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히고, 어깨를 부딪쳐 엘리베이터 계단에서 처참하게도 거꾸로 고꾸라졌다. 팔과 무릎이 깨져 피가 흘렀고 순식간에 피멍이 올라와 다리를 물들였다. 하지만 그때, 내가 지키려 했던 건 적어도 내 팔목이 아니라 노트북이었다. 아이를 지키려는 엄마처럼.
영화를 함께 본 친구가 말했다. 삶은 무수히 많은 주저흔의 집적이라고. 시적인 말이라 어쩐지 적어놓고 싶었다. 문득, 문학을 배우던 스무 살 때, 누군가 칠판에 적어놓았던 말이 떠올랐다. 문학은 삶이다! 정말 문학은 삶일까? 문학이 삶보다 앞설 수 있을까. 문학을 위해 삶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를, 그 모든 것을. 이런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밤이었다. 이미 마감을 넘긴 원고가 쌓여 있는 내 책상을 바라보면서.
●더스토리: 브라이언 크러그만, 리 스턴탈 감독 작품. 브래들리 쿠퍼와 제레미 아이언스, 데니스 퀘이드가 로리와 올드맨, 클레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