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뉴욕 맨하탄의 미드타운 전경

"월스트리트엔 왜 가셨어요?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

뉴욕 금융권의 최신 동향을 취재하기 위해 월스트리트(Wall street) 대로변에 숙소를 정한 기자를 보고 현지 금융인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을 던졌다. 말 그대로다. 월스트리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적어도 최신 금융권의 동향에 관한 한.

금융회사나 기관만 해도 그렇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뉴욕연방은행을 제외하고 나면 월가에는 이렇다 할 게 없었다. 뉴욕연방은행 역시 주소지로 따지면 월스트리트보다 북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리버티 스트리트(Liberty street)다. 엄밀히 말하면 월스트리트가 아니다.

본래 월스트리트는 맨하탄 남부 트리니티 교회로부터 이스트강(江)으로 빠지는 길이 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일컫는다. 1792년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들어선 뒤 수많은 금융사들이 둥지를 틀면서 대규모 금융가를 형성했다. 오늘날 세계 금융의 심장부라 불리는 곳이다. 월스트리트라는 단어 자체가 이제는 금융시장 일반을 대변하는 말처럼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3년 2월 현재, 월스트리트는 명물인 황소상과 뉴욕증권거래소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관광객, 근처 명품 아울렛인 센츄리21에서 쇼핑을 즐기려는 소비자들로 북적일 뿐, 금융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대부분의 금융사의 본사는 맨하탄 시내인 미드타운(Mid town) 근처에 밀집해 있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 메트라이프, 씨티, 바클레이즈 등 대형 금융사의 간판들은 타임스퀘어 광장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록펠러 센터 등이 위치한 미드타운 중심가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수많은 취재원들과의 만남도 이 곳에서 이뤄졌다.

9.11 테러 현장.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들은 월스트리트 근처에 있던 금융사들이 미드타운으로 옮겨오게 된 계기가 바로 2001년 9.11사태라고 했다. 월스트리트 인근에 있던 월드트레이드센터(WTC)가 알카에다 무장세력에 의해 비행기 테러를 당하면서 월가 금융사들은 하나 둘 본사를 옮겼다.

그렇다고 본사들이 전부 미드타운으로 올라온 건 아니다. 또다른 테러에 대비해 본사의 기능을 분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게 중론. 인사, 재무, 전략, 리스크관리, 영업, 리서치, 트레이딩 등 각 부문을 몇 덩어리씩 묶어 여기저기 나눠 배치하면서 사실상 본사가 여러 개가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들 했다. 이른바 위치 상의 헤지(위험회피)를 단행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와 더불어 전산 처리 속도가 빨라진 것도 작용했다. 실시간 원격통신이 가능해진 다음에야 굳이 금융사들이 월스트리트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

월스트리트는 금융 위기를 겪으며 또 한 번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리먼브러더스와 베어스턴스 같은 대형 투자은행들이 파산했고,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는 공적자금을 수혈 받고서야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구조조정이 일상이 되면서 투자은행이 상업은행이 되기도 했고, 민간 금융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금융기관이 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인 2008년 9월 23일자 기사에서 “우리가 아는 월스트리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대형 투자은행들이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신문은 또 “월스트리트는 그동안 (금융업을 나타내는) 하나의 은유로 쓰였지만 이제는 ‘구제금융’이나 ‘악성채무’ 등을 대표하는 단어가 될 듯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심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2013년 미 금융가의 표상으로서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건재하다. 많은 금융사들이 터를 옮겨 잡았지만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상징성을 잃지 않고 있다. 1987년에 개봉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스트리트’가 2010년 속편 ‘돈은 잠들지 않는다(money never sleeps)’를 선보이면서 ‘월스트리트’라는 타이틀을 그대로 달고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월스트리트는 월스트리트일 뿐 미드타운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