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혁 워싱턴 특파원

워싱턴 인근 로펌에 다니는 한 교포 변호사가 들려준 얘기다. 지난달 아이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스키장에 갔더니 백인 스키 강사가 아이들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스키장에서는 강사들에게 중국어 배우기를 의무화하고 있었다. 경기 불황으로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블루오션'인 중국 어린이·청소년들을 스키 캠프에 유치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한다. 이 변호사는 "강사 중에는 단순한 인사말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중국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이도 꽤 돼 놀랐다"고 했다.

미국인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외국어 배우기에 관심이 없기로 꼽히는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인 스스로도 이런 농담을 한다.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트라이링구얼(trilingual), 2개 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바이링구얼(bilingual)이라고 한다. 그럼 1개 국어만 하는 사람은?… 정답은 '아메리칸'이다."

미국인의 '외국어 무관심'을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 때문으로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전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려고 기를 쓰고 매달리는 상황에서 굳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어에 들일 시간과 돈을 다른 특기 개발에 투자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미국의 부유층·지식층 사이에서는 '중국어 배우기'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한 유치원은 수업의 90%를 중국어로 진행한다. 연 수업료가 2만달러가 넘지만 원생 150명 중 절반 이상이 중국계와는 상관없는 순수 미국인 자녀라고 한다. 오클랜드의 또 다른 중국어 학교는 1년 만에 학생 수가 4배 늘었다. 영상 통화로 베이징(北京) 현지 선생님과 대화하는 중국어 몰입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려고 1년간 휴직하고 중국 청두(成都)에서 살다 온 변호사 사례가 언론에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미국 외국어교육평의회에 따르면 미국 전체 공립 중·고교에서 중국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한 학생 수는 2004년 2만명에서 2012년 10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재 10만명을 양성하겠다는 '10만 스트롱 이니셔티브'가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는 미국인들이 "앞으로 중국어를 하면 더 앞서고, 더 편안하고, 더 돈이 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어를 배우려고 했던 바로 그 이유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고, 그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어느 현장에서든 가장 확실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아직도 미국 정치판 등 표면에선 "중국은 싸구려 상품으로 시장을 어지럽히고, 해킹질로 미국 기업 비밀을 훔쳐가는 나라"라는 식으로 중국을 얕잡아 보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뒷면에서 미국 주류층은 생전 처음 보는 한자(漢字)·성조(聲調)와 씨름하며 '중국의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