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40년간 명동을 중심으로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명동 신상사파의 대부 신상현(81)씨가 생애 최초로 언론 인터뷰를 했다.
육군 상사출신으로 주먹계를 은퇴한 뒤 외제차 사업을 하다 현재 그만둔 그는 월간중앙 4월호와 인터뷰에서 “지금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 청소년들은 그 세계를 절대 동경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중앙일보가 18일 보도했다.
‘명동파’ 이화룡의 중간 두목급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신씨는 신상사파를 결성해 1960년대 서울 명동·충무로·을지로 일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1975년 이른바 ‘명동사보이호텔 사건’으로 몰락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1975년 1월2일 호남 출신인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씨가 회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조직원들과 함께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열렸던 신상사파의 신년회장을 습격했고, 이 사건으로 신상사파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조폭계에서 ‘낭만파 주먹시대’가 끝나고 ‘칼’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조폭계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동재파’ 등 이른바 ‘호남 3대 패밀리’시대가 열렸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신씨는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을 겪으며 신상사파가 몰락했다는 설이 있다"는 질문에 "그 사건 이후 호남 주먹이 커진 것이 사실이지만 명동파는 90년대 초반까지 조금도 세가 위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명동사보이호텔 사건'에 대해 "세계 챔피언 김기수씨의 매니저를 했던 서모씨가 우리 사람이었는데 그를 호남 주먹들이 납치해 구출해온 적이 있다"며 "이 사건에 대해 호남 주먹들이 사과하러 온다기에 그날 사보이 호텔에서 기다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나는 호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행동대장 조양은이 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그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배후였던 염천시장 주먹 조창조는 우리의 추적을 피해 3년이나 도망다니다 내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조양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고 했다.
신씨는 최근 사망한 김태촌씨에 대해서는 "김태촌은 35년 넘게 감옥 생활을 했다. 선악을 떠나 가엾은 영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내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가 오랜 기간 보스로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신세 진 정치·경제·연예계 인물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칠었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신씨는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주먹계의 대부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자질구레한 이권을 밝히지 않고, 잔인한 폭력을 무분별하게 휘두르지 않았다"며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됐지만 전국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지금도 내게 자문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일대일 싸움에선 진 적이 없었다는데'라고 묻자 "가장 중요한 건 '선빵'(선제공격)이다. 체구가 아무리 커도 주먹으로 턱을 한 번 정확하게 맞으면 단번에 쓰러진다"며 "기술도 중요하지만 속도와 담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50년대 서울의 주먹계에 대해 "당시 서울의 주먹들은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로의 김두한, 명동의 이화룡과 이정팔, 동대문의 이정재가 그들"이라며 "이화룡씨는 선배로 존경했지만 알려진 것처럼 그의 행동대장 역을 맡은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50년대를 '낭만의 주먹시대'로 불렀던 이유에 대해 "당시엔 피를 부르는 싸움이 드물었다.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몰매를 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위 '다구리(몰매)'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당시 주먹들은 태권도·씨름 등 전통 무술이나 복싱·레슬링 등 격투기를 익혀 몸을 단련했다"고 했다.
이어 "미리 사시미 칼 같은 흉기를 준비하는 일은 수치로 생각했다. 싸움은 주로 일대일 '맞짱'으로 이뤄졌다. 싸우다 상대방이 다치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며 "다친 사람을 길거리에 방치하고 자리를 뜨는 일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로 치부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