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 기자 시절, 다시 만나는 커플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른바 '구관이 명관!' 시리즈 중 한 편이었는데, 친구부터 물건까지 오래된 물건들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자는, 뭐 그런 식의 글이었다. 문득 이 기사를 본 후배 한 명이 늦은 점심을 먹다가 "선배? 혹시 디스플레이 커플이란 말 알아?" 하고 묻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녀가 썼던 황당하게 웃겼던 기사를 기억하는 터라, 당시 나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시들지 않고 피어 있는, 향기도 감정도 없는 조화(造花) 같은 커플들에 대한 그 기사는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위장 부부'에 관한 글이었다. '웨딩의 전당'을 '예술의 전당'으로 착각할 만큼 예식장 가기를 싫어했던 그녀가 결혼식장에서 가장 보기 싫다고 결론 내린 것은 다름아닌 조화. 예식장에 만발한 조화를 보면 자기가 아는 디스플레이 커플들이 맛없는 예식장 음식처럼 한둘씩 생각난다나 뭐라나. 하긴 내 경우도 이런 커플을 아예 보지 못한 건 아니다. 몇 년 전 모 가수의 인터뷰 때 결혼 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가 너무 해맑게 웃으며 "좋다는 거 알면서 뭘 물으세요?" 하고 되묻던 그가 이틀 후 이혼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등장하는 걸 보고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으니까.
요즘엔 커플을 일컫는 단어를 점점 더 늘려야 할 것 같다. 게이 커플, 동거 커플, 디스플레이 커플, 이혼 커플에 재혼 커플까지. 종류도 형태도 다양하다. 철딱서니 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드라마 '연애시대'의 손예진이나 감우성을 보면 이혼도 우정으로 대체되며, 꽤나 근사하고 낭만적일 수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카페에 앉아 동성 친구들끼리나 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얘길 털어놓을 수 있는 이성 친구를 갖는 게 여자들의 판타지라면, 연애시대의 감우성은 그것에 부합하는 전(ex) 남편이니까 말이다. 바야흐로 나는 이것이 21세기 연애의 새로운 블루오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관이 명관 시리즈를 쓸 때, 그러므로 심각한 얼굴로 이런 글을 써야 했던 게 아닐까. 이혼한 전 남편도 다시 보자. (다른 여자에게 뺏기기 전에) 다시 (뜯어)보자!
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실연 몇 번과 실패 몇 번을 거치며 남자 찾기에 지치다 못해, '어쩜 내 짝은 여자일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정치적 레즈비언 영화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영화의 초점이 연애의 다양성에 대한 쿨하고 위트 있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서 여자와 연애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 여자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트리뷴'의 편집자로 일하는 유대인 여성 제시카는 직장 보스와 헤어진 후, 엄마의 극성스러운 남자 추천에 충분히 질린 상태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그녀는 엄마의 이상형이 돈 잘 버는 늙은 남자라면 스스로 제대로 된 짝을 찾아 나가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신문에서 시인 릴케의 글귀를 인용한 '애인 구함 광고'를 본다. 릴케 팬이었던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갤러리의 디렉터로 일하는 헬렌은 제시카처럼 이성애자지만 뭔가 다른 경험을 하려고 광고를 낸다. 친구들에게 "오늘은 동성애, 내일은 문신이야?"라는 잔소리를 듣긴 하지만, 적극적이고 호기심이 강한 헬렌에게 여자와 연애하는 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이다. 첫 만남에서 서먹했던 그들은 원하는 립스틱 색깔을 얻기 위해 '섞어' 바르는 기술을 전수하던 중, 친밀함을 느끼며 점점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시카는 헬렌의 격려로 포기했던 화가의 삶을 찾아가게 된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실제 커플들이 섹스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레즈비언 섹스 과정을 위트 있게 보여준다. 친밀함이 육체적 단계로 진입하는 이 단계는 보통의 격정적 남녀 관계와 다르게 서로 '공부'하고 '대화'하며 여성적으로 진행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 이들은 성향이 달라 동거 후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이별한 후, 서로의 삶(제시카는 헤어졌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을 응원해주는 영화의 엔딩은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는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한때 사랑했던 커플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보단 어쩜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 더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연애에 대해 고민하던 내 친구에게 이 영화를 권유해준 건, 세상엔 남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볼 때 삶이 더 풍성해진다는 걸 말하기 위한 것이다. 맥락에 따라 오해 여지가 있는 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가진 편견을 내려놓을 때 세상이 우리에게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건 사실이니까.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좋은 공간으로 뉴욕만 한 곳이 있을 리 없다. '바'에 앉아있는데 "난 여자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뉴욕은 영화제 시상식에서 "저 동성애자예요!"라고 말하는 조디 포스터나, 한때 제니 시미즈라는 여성과 연인 관계였고, 스스로 양성애자임을 밝힌 적 있는 여섯 아이의 엄마 앤젤리나 졸리가 자라고 사랑한 도시 아닌가.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유명 배우는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저예산 영화로 2001년 LA필름페스티벌에서 관객상과 시나리오·연기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주연 배우로 열연한 두 배우 제니퍼 웨스트펠트(제시카 역)와 헤더 예르겐슨(헬렌 역)이 함께 쓴 대본을 썼다(둘 다 이성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