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의 마코토
이영래 지음|HNCOM|318쪽|1만4000원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길을 열어준 조선인이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1857~1903).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그는 1903년 한국인 고영근에게 암살당한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우범선의 장남이 바로 우장춘(禹長春·1898~1959·사진 왼쪽)이다.
'한국 농업의 선구자'이자 세계 유전학의 기류를 바꾼 농학자인 우장춘. 저자가 우장춘을 그저 '씨 없는 수박'을 (개발이 아닌) 우리나라에 보급한 과학자로 조명했다면, 이 책은 별다른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우장춘에 관한 기존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틀렸거나 곡해됐다고 주장한다. 출생부터 기구한 그의 삶은 "한·일사의 불편한 부분과 맞닿아 있어서" 잘못 알려진 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발품을 팔아 각종 기록과 비화를 발굴하고, 기존에 알려진 사료를 새롭게 해석한다.
◇종의 합성으로 적자생존론을 깨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우장춘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농학을 선택했다. 1919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했고 일본 농림성의 농사시험장에 취직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조선의 혈통을 가진 그가 종묘학자가 됐다는 건 불편한 일. 당시 일본에서 농학, 특히 종묘학은 우생학이 시대의 대세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신봉한 우생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돼 있었다. 종자를 개량해 우등한 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제국주의 과학자들의 과제였다.
우장춘은 엘리트 우생학자였던 일본인 상사 데라오 히로시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해 데라오가 우장춘 필생의 연구 결과까지 빼앗았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1930년 농사시험장 본관에 화재가 일어난다. 우장춘이 연구하고 있던 피튜니아 종자 연구도 불에 타 버렸다. "수년간 노력 끝에 완성한 논문과 자료들이 원인 모를 화재로 모두 불탔고, 이후 사카타 상회는 새로운 피튜니아 종자 개발에 성공했다. 사카타 상회로 하여금 이 피튜니아 종묘를 재배하게 한 것이 데라오 히로시였고, 훗날 그는 사카타 종묘회사 사장이 된다."(166쪽)
'열등한' 조선 혈통의 과학자는 우생학에 '일격'을 가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세계 유전학의 궤도를 바꿔놓은 박사 학위 논문 '종의 합성'이 그것. 저자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공존'의 원리를 보여줬다"며 "서로 다른 개체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생태계의 모든 것에 각자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마코토'의 삶
우장춘은 1950년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온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가 농업 발전을 위해 그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 것.
1950년대 한국에서의 삶은 지지와 반목으로 구성됐다. 한국인에게 그는 자랑스러운 농학자이며, '역적의 아들'이었다. "우장춘이 아버지 우범선을 자랑스러워했다", 대한민국을 조국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한국어를 쓰지도 배우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한국행을 택했을까.
저자는 "'마코토(誠)'로 일생을 살아가고 싶다"던 그의 육성에서 답을 찾는다. 마코토는 퇴계 이황의 사상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전파된 사상으로, '선악이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뜻한다. 농림부 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면서 오로지 채소 종자 개발에 매달린 것이 이의 증거라는 것이다. 우장춘은 죽기 직전 병상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은 후에야 그저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무·배추의 종자를 생산해 자급자족을 가능케 했고, 병 없는 씨감자와 체계적 감귤 재배 기술도 그의 발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