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치매지원센터. 둥근 몸통의 로봇이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는 바둑판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10여명의 눈길이 로봇에 집중됐다. 로봇은 "제가 움직인 대로 똑같이 이동해 보세요.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시공간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 줍니다"라고 말했다. 로봇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바둑판 위에 섰다. 자신 있게 움직이던 김모(67)씨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로봇의 이동 경로를 잊어버린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로봇은 "제한 시간이 다 됐습니다. 다음엔 꼭 성공하세요"라고 말했다.
이 로봇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2010년부터 2년간 제작해 작년 초 내놓은 치매 케어 로봇 '실벗'이다. 의료진과 협의해 제작한 치매 예방·치료 프로그램 7개가 내장돼 있다.
로봇을 이용한 치료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3년 전부터 기억력에 문제를 느껴 치매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해왔다는 김씨는 "당시엔 금방 들은 얘기도 까먹고 손자 이름이 기억이 안 나 펑펑 울기도 했다"며 "로봇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고 요즘은 기억력이 좋아져 실수도 잘 안 한다"고 말했다. 로봇을 제작한 KIST 김문상 지능로봇사업단장은 "참여하는 사람의 기억력, 집중력 등이 게임 기록으로 저장되는데, 이 기록의 변화가 치매 진단이나 진행 속도를 살피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실벗의 치매 예방 효과는 의학적으로도 검증됐다. KIST와 삼성서울병원이 진행한 공동 연구 결과, 3개월간 하루 1시간씩 로봇 프로그램을 이용한 60세 이상 노인 24명의 대뇌피질이 미세하게 두꺼워지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같은 기간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은 37명의 대뇌피질은 얇아졌다. 대뇌피질은 감각과 운동, 언어 기능을 담당한다.
KIST는 혈액검사를 이용한 치매 조기 진단법에서도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뒀다. 현재 치매 진단은 과정이 복잡하고, 오진(誤診)도 많다. 혈액으로 치매 진단이 가능해지면 간단한 건강검진만으로 치매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된다. KIST 김동진 뇌과학연구소장은 "알츠하이머 치매의 원인인 아밀로이드 단백질은 혈액에도 들어 있다"며 "혈액에 있는 아밀로이드 단백질의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치매 진단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기술은 5년 내 상용화를 목표로 임상 시험을 준비 중이다.
치매 완치의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 결과도 있다. 지금껏 치매에 걸리면 '뇌세포가 파괴돼 기억이 사라진다'는 게 정설이었지만, '뇌에 기억이 남아있는데도 이 기억을 제대로 꺼내오지 못하는 것' 이라는 새로운 치매 원리의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다. KIST 이창준 신경과학연구단장은 "치매 환자의 기억회로를 복원하면 이미 치매가 진행 중인 환자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KIST에 따르면 로봇을 활용한 치매 예방·치료, 혈액을 이용한 조기 검진, 치매 원리 연구는 모두 세계 최초의 성과로 각각 저명한 국제 저널에 논문 게재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상용화되기까지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 1대당 3000만원인 치매 케어 로봇은 대량생산이 어려워 현재 국내 2곳, 해외 1곳에만 보급된 상태다. KIST의 치매 관련 연구진은 20여명, 1년 예산은 60억원 정도다. 미국 대형 제약회사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