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Jacob Malik)가 휴전제안을 했다. 이승만은 “이 나라를 분단하려는 어떤 평화안도 수락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국회와 국민들도 이승만을 지지했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면서도 내심 휴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후 대한민국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보장책은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뿐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미국을 압박할 카드 두 가지를 찾아냈다. 하나는 유엔군으로부터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북진을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도움 없이 북진통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엔군사령부는 혹시나 하고 ‘에버레디계획(Plan Everready)’을 준비했다. 골칫거리인 이승만 대신 다루기 쉬운 사람을 남한의 새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이승만 정권 전복계획이었다.
또 하나는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미국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요구를 무시했다. 미국의 처사에 이승만은 격분했다. 마음에 걸렸던지 미국은 브리그스(Ellis O. Briggs) 주한미국 대사와 클라크 장군을 이승만에게 보내 “정전협정 체결에 협력하면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당시 상황에서 미국의 약속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이승만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누구에게 싸워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실수다. 이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에게 협력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며칠 후 다시 방문한 클라크에게 이승만은 “한국 정부는 현재의 휴전조약을 결코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살을 의미한다 해도 계속 싸울 것이다. 이후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조치도 자유로이 취할 것이다”라고 했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워싱턴과 국제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등 뒤에 칼을 꽂는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다소 늦었지만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느긋해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미국은 휴전을 하려면 이승만을 달래야 했다. 워싱턴은 대통령 특사로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과 육군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를 파견했다. 이때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은 서신을 보내 “한국이 휴전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다”며 이승만에게 쌓인 앙금을 드러냈다.
1953년 6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7월 12일까지 이승만과 씨름을 벌였다. 이승만은 “4가지 요구사항을 들어 주면, 정전협정을 받아들이겠다”며 선수를 쳤다. 첫째, 상호방위조약을 보장한다. 둘째,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을 지원한다. 셋째, 한국인 반공포로는 비무장지대로 이송해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 넷째, 정치회담에도 시한 제한(90일)을 둔다.
로버트슨은 이승만의 요구사항을 워싱턴에 문의했다. 6월 27일 아이젠하워는 서신을 통해 “필리핀과 유사한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할 수 있다. 하지만 상원의 인준이 필요하므로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에 유리한 방위조약 내용을 요구했다. 첫째, 한국의 법적 관할권은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확대하는 것을 양국 정부는 인정한다. 둘째, 필요할 경우 한반도와 근해(近海)에 미국의 육·해·공군기지를 설치한다.
셋째,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자동으로 개입한다. 적용범위는 본토·섬·군대·선박·비행기를 포함한다. 이에 대해 미국은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개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받아들였다.
이승만과 로버트슨은 1953년 7월 11일까지 모든 문제에 합의했다. 첫째, 휴전성립 후 한미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이를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상원의원들을 설득한다. 둘째, 미국은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우선 2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한다. 별도로 유엔군사령관은 95만 달러어치의 식료품을 한국민에게 공급한다. 셋째,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이에 합당한 해·공군력을 지원한다. 넷째, 정치회담에서 90일을 경과해도 구체적 성과를 얻지 못하면 한미 양국은 철수한다. 다섯째, 정치회담 이전에 공동 목표를 토의하기 위해 한미 간 고위급회담을 개최한다.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중앙청에서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고, 그해 10월 1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정식으로 서명했다. 1954년 1월 26일에는 미 상원이 조약을 비준했다. 비준서 교환은 그해 11월 17일 이뤄졌다. 이날 양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에도 조인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원조건에 “유엔군사령부가 한국 방위에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고 합의했다.
이로써 한미동맹이 그 ‘거보(巨步)’를 내딛게 됐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한국은 놀랄 만큼 발전했고, 미국은 그런 한국을 “안보적·경제적 우등생”이라며 치켜세웠다. 한미 양국 모두의 승리였다.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적 안보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발전보다도 우선돼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이승만이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의 ‘위대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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