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저는 까치발을 띠고 현관으로 갔습니다. 문 앞에 배달된 조선일보를 집어든 뒤 속지 한 장을 살그머니 빼냅니다. ‘新줌마병법’이 실린 지면입니다. 신문은 다시 감쪽같이 접어 소파에 내려놓고, 빼낸 속지는 제 출근 가방에 구겨 넣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침식사 준비를 합니다.
알람 소리에 잠을 깬 남편이 거실로 나옵니다. 신문을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뒷목이 찌르르 당깁니다. 마지막 면까지 다 훑어 보았는지, 남편은 신문을 덮고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갑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별안간 남편이 휴대폰을 들고 튀어나옵니다. 입가에 면도거품이 묻은 채입니다. “뭐야? 오늘은 또 뭐라고 남편을 팔았길래 아침부터 사방에서 문자가 날아오는 거야? 신문 어디 갔어?”
4~5주 간격으로 게재, 6년 5개월째 현장 중심 實戰형 콩트식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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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新줌마병법'이 조선일보에 게재된 날 아침이면 저희 집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만나 지지고 볶는 얘기들을 쓰다보니, 그것이 꼭 우리 집 얘기가 아니어도 우리 집 이야기로 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물증'까지 감추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직접 겪은 갑상선 암 수술(말 그대로 목을 땁니다!)을 소재로 에세이(7월2일자 '열대야에 부르는 사미인곡')를 쓴 터라 '후환'이 두려웠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수술날짜를 모르고 있었다는 팩트가 그대로 적혀 있으니 펄쩍 뛸 것은 당연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문제의 에세이를 읽은 남편은 '정정보도'를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수술 날짜를 잊은 게 아니라 마누라, 그러니까 제가 수술날짜를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몰랐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마흔을 한참 넘긴 아줌마의 건망증이 오죽하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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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마병법'이란 제목의 꽁트식 에세이를 처음 쓴 건 2007년 3월, 그러니까 지금은 중학생이 된 아들녀석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중1이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되는 학년이라고는 하나, 맞벌이 초보엄마였던 저에겐 초등 1학년 학부형 노릇부터 벅차기 그지없었습니다. 웬 '엄마숙제'는 그리도 많고, 준비물도 많고, 학교 갈 일도 많은지.
이듬해 늦둥이가 태어나면서는 ‘몸이 삭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절감했습니다. 여자들 살기 무지무지 편해진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나의 하루하루는 왜 이렇게 고단한가, 주말이 주중보다 더 바쁘고 피곤한 건 옆집 여자도 마찬가지인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왜 결혼과 동시에 밴댕이가 되는가, 고부갈등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인가 등등의 의문들을 풀고 싶은 소망에 감히 ‘병법(兵法)’이란 문패를 달고 시작한 것이 줌마병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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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수다에 귀기울이게 된 것도 그 무렵입니다.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앉은 또래 엄마들의 고만고만한 사연들, 동네 한증막에 둘러앉아 살이 벌겋게 익도록 펼쳐지는 아줌마들의 불꽃 입담 듣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습니다. 글감이 궁해지면 시어머니 앞에도 수첩을 들고 앉았습니다. 무뚝뚝하고, 그저 아들밖에 모르는 경상도 할매인 줄만 알았더니, 남편 몰래 춤을 배우러 나섰다가 들통이 나 줄행랑을 쳤던 귀여운 여인입니다.
여성 편향적인 줌마병법이 균형을 잡은 건, 주말섹션 ‘Why?’(기획취재부) 덕분입니다. 아저씨들 수다가 아줌마들 이상으로 감칠맛나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목석처럼 보이는 남자들 가슴에도 울분과 낭만과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시절 Why?를 함께 만들었던 ‘아저씨 기자’들을 통해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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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모은 글감, 에피소드를 버무려 꽁트, 혹은 팩션(faction·fact+fiction의 합성어)으로 만든 것이 '新줌마병법'입니다. 소설 쓰는 최재경 말에 따르면, 열한장 짜리 '손바닥 소설'입니다. 실제 주인공이 있지만 실명을 밝히진 않습니다. 별것 아닌 일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 가정사(家庭事)! 실제로 아들녀석 친구의 부모 이야기를 줌마병법에 그대로 썼다가 의절(義絶) 직전까지 간 일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남편에게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에피소드를 가지고 써도 거기 등장하는 ‘남편’은 모두 저의 실제 남편으로 여기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남편뿐 아닙니다. 저의 친정엄마는 불치병에 걸렸다가, 과부댁도 되었다가, 급기야 의붓엄마로 변신하는 ‘봉변’을 당하셨습니다.
한번은 눈이 너무 높아 마흔살 되도록 장가를 못가는 남자후배 이야기를 모티브로 줌마병법을 썼더니 지방 사시는 어느 60대 남자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곱게 키운 딸이 하나 있는데 맞선을 보게 하면 어떠신지, 청하십니다. 줌마병법 속 노총각 어머니가 저인 줄 아셨던 거지요.
필화 및 義絶 일보직전 사태도 여럿… '맛있는 글쓰기' 참여 어르신들의 열정에 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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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화사건'도 있습니다. 이른바 '달랑 두쪽' 사건! 작년 2월21일자 新줌마병법 '오고가는 덕담 속에 꽃피는 봄이 오네'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부부가 평상에 올라앉아 알콩달콩 입다툼을 하는 내용인데, '찌다 만 찐빵처럼 생겼다'는 서방님 놀림에 '달랑 두 쪽밖에 없는 애비보다 만 배는 훌륭한 나라의 일꾼으로 (자식들을) 키운 내가 애국자 아니겠냐'며 맞서는 마나님이 나옵니다.
한데 에세이를 읽은 선배기자가 ‘어떻게 ’달랑 두쪽‘이란 표현을 신문에 쓸 수 있냐’며 화를 내십니다. ‘명백한 남성모독’이라는 겁니다. 저는 ‘넉살과 해학 차원’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선배 말씀에도 일리가 있어 이후로는 아무리 재미난 표현이라도 두번 세번 곱씹어보고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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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줌마병법' 덕에 전국의 독자분들과 이런저런 편지와 이메일 주고받는 기쁨이 그만입니다. 그것도 재주라고, 지난해부터는 '맛있는 글쓰기'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말솜씨라고는 없는 제가 50~60대 어르신들을 앞에 두고 강단에 섰으니 말 다했지요. 그런데 이게 의외로 재미있고 보람 있습니다. 아니, 그분들의 열정에 제가 놀랐습니다. 연일 폭설에 꽝꽝 얼어붙은 길을 뚫고 서울 근교는 물론 경기도 이천, 포천, 심지어 충북 진천에서까지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강의실은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3 교실 못지않게 뜨거웠지요. 어르신들은 의문이 들 때마다 손을 들어 질문했고, 숙제 글에 제가 빨간 펜으로 첨삭하는 과정을 보여주면 ‘신세계’를 목격한 양 두 눈이 휘둥그레지셨습니다. 동료 수강생들의 글을 함께 읽어내려가며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가 눈물바다가 되었지요. 서툴지만 소박하고 진솔한 글쓰기에 저의 줌마병법은 댈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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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곁길로 새었습니다만, 돌아보니 줌마병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에게 가장 큰 위안이자 즐거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곳처럼 마음결이 뾰족뾰족해질 때마다 줌마병법을 쓰다보면 조금은 착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누그러졌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걸, 줌마병법 5년을 쓰면서 깨달은 셈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졸고를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허투루 쓰지 않겠습니다.
참, 저를 매번 ‘윤심덕’이라 부르며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응원의 댓글 달아주시는 남기열 독자님께 ‘클릭! 취재 인사이드’ 코너를 빌어 감사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