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2부 ‘발퀴레’를 관람했을 때 일입니다. 당시 우리 시간으로 자정(子正)에 시작해서 정확히 새벽 5시에 끝났습니다. 박수도 치지 않고 서둘러 극장을 빠져나온 뒤, 호텔 방에서 고단한 육신을 누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공연을 보기 전, 점심(한국시간 기준)때 낮잠을 청하고, 저녁에 과식을 삼가며, 커피를 숱하게 쏟아부어 마셨지만 공연 내내 수마(睡魔)를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막(幕)이 내리고 나니 (한국시간으로 아침시간이 돼서) 눈이 말똥말똥해지더군요.
◇살인적인 時差와 비싼 음악회 티켓, 어떻게 이겨낼까?
근래 음악과 공연, 미술과 요리 등으로 주제가 있는 해외 여행이 유행입니다. 이 가운데 큰 마음 먹고 거금을 들여 클래식 음악의 본 고장인 유럽까지 찾아가 각종 음악회나 페스티벌 등을 현장에서 즐기는 애호가들도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쉽게 넘기힘든 시차(時差)와 비싼 티켓 가격이라는 장벽이 있습니다. 여름 휴가철에 잘츠부르크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뮌헨 오페라 축제 등에 한번 가려면, 여름 성수기에 적용되는 항공 요금과 숙박비가 만만찮은데다 티켓 가격도 고가(高價)여서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유럽 명문(名門) 페스티벌의 티켓을 우리가 비싸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몇개 있습니다.
먼저 유럽의 공연장이나 페스티벌 주최 측은 온라인(on-line)으로 구매하는 이방인 관객보다는 오프라인으로 직접 구입하는 ‘홈 팬’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합니다. 우리야 평생 한 번 방문하면 같은 곳에 다시 갈 가능성이 낮지만, 자국민들은 인근 도시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에 다시 찾아갈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죠.
주최 측도 당연히 ‘홈 팬’ 관리에 더 신경씁니다. 유럽의 공연장들은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는 좌석과 현장 매표소에서 구매할 수 있는 티켓의 종류와 수량에도 조금씩 차이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저렴한 좌석 등급은 현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개막 6개월 전부터 일찍 티켓 판매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음악 페스티벌은 대개 7~8월에 열리고, 이 축제가 끝난 뒤 9월초부터 새 시즌에 들어갑니다. 페스티벌이든, 새 시즌이든 티켓 판매는 개막 5~6개월 이전인 3~4월부터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파리 같은 유럽 대도시에서 시즌 티켓 판매를 시작하는 날이면, 보고 싶은 연주회를 빨간 펜으로 모두 표시해놓은 노년 관객들이 안내 책자를 들고서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룬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공연장 티켓 창구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OECD에서도 자타공인하는 최장(最長) 노동 시간을 기록하는 국가답게, 상대적으로 휴가 계획을 늦게야 확정하는 우리로서는 매우 불리합니다. 바쁜 업무에 치여서 우리는 휴가 일정도 제대로 짜지 못하니 티켓 구매가 늦어지고, 당연히 값싸고 좋은 자리를 먼저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최고급 개막작 욕심 버리고 야외 공연 관람 등도 평생 추억 남는 감동
이렇게 보면 유럽에서 열리는 공연 티켓을 값싸게 사고 싶다면, 결국 ‘가장 이른 시점에, 되도록 현장에서, 여러 티켓을 묶어서 사는 편’이 최고의 정답(正答)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정답’을 몰라서 비싼 돈을 들여서 뒤늦게 살까요? 조기(早期) 예매가 힘들 경우에는 대안을 몇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가장 화려한 출연진이 나오는 개막작을 보겠다는 ‘욕심’을 깨끗하게 버리는 대신, ‘주말 음악회’나 ‘오전 음악회’처럼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알찬 음악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유럽 최고의 명문 음악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대형 오페라 한 편을 보려면 최대 200~300유로(약 30만~45만원)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강 하나를 건너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열리는 아침 음악회에 입장하려면 20~30유로(약 3만~4만5천원)면 충분합니다.
유럽 최고 지휘자와 성악가, 교향악단이 즐비한 메인 연주회와 오페라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아침을 깨우는 이 음악회는 ‘나만의 추억 거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떠난 독일 최고의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와 고음악 명인 프란츠 브뤼헨의 지휘 모습을 저는 모두 이 음악회에서 보았습니다.
둘째, 반드시 극장에서 비싼 돈 내고 공연을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티켓 가격도 아끼고, 좋은 추억도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많습습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서는 극장 주변의 야외 광장에서도 대형 스크린으로 공연을 중계해주는 경우가 많지요.
맘껏 소리 내거나 기침하기도 어려운 실내 공연장에서 나와서 야외 광장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공연에서 느끼는 감동이 티켓 가격과 반드시 정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극장 안에 들어가도 피곤한 일정이나 시차 때문에 잠으로 날려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공연 관람 횟수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가족이나 친구와 인근 도시로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추천드립니다.
제 개인 경험입니다. 수년 전 바그너 음악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가족과 함께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름 음악 휴가 이후에 우리 가족은 다 함께 감동의 물결에 젖기는커녕, 오히려 불화와 갈등으로 얼룩졌답니다.
바그너의 4부작은 1부만 휴식 시간 없이 2시간 45분, 2~4부는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5~6시간에 육박하지요. 또 이 4부작의 1~2부는 이틀간 연달아 공연하지만, 3부와 4부를 공연하기 전에는 하루씩 휴식 일을 갖습니다. 이 때문에 4부작을 모두 보려면 나흘이 아니라 6일이 걸립니다.
오전의 짧은 휴식을 제외하면 공연 당일마다 오후부터 한밤까지 냉방시설도 변변치 않은 극장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오로지 바그너의 음악극만 관람해야 합니다. 바그너는 죽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지요. 저야 ‘바그너 몰입(沒入) 교육’에 환호를 터뜨렸지만, 우리 가족은 사실상의 ‘바그너 감금 상황’에 연방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그해 여름 이야기가 나와도 바그너의 ‘바(Wa)’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대신 바이로이트의 실내 수영장에서 독일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함께 수영한 이야기, 인근 뉘른베르크에서 맥주를 마시며 독일 축구를 관람한 이야기, 밤베르크에서 훈제 맥주를 마신 이야기만 나누지요.
공연에서 느끼는 감동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감흥이나 기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부디 잊지 마시기를. 공유할 수 없는 감동은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강요가 될 수도 있답니다. 취향의 ‘상대주의’야말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입니다.
◇ 김성현 기자는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음악 담당 기자로 오래동안 일했다. 조선일보에서 「클래식 ABC」 코너를 연재했고 블로그(danpa.chosun.com)를 통해 음악 동네 소식과 국제 뉴스 뒷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클래식 수첩』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스마트 클래식 100』등을 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 평전 『사이먼 래틀-카라얀을 뛰어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휘자』와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다니엘 바렌보임-평화의 지휘자』를 각각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