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鄭夢九·75) 현대차그룹 회장이 요즘 미국 주지사(州知事)들의 집중적인 로비(Lobbying)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한 ‘러브콜’을 넘어 ‘한번만 꼭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미국 주정부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애걸복걸하고 있을 정도”(현대차 관계자)라는 전언(傳言)이다.
미국에서 주지사들의 존재감은 우리나라의 도지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한민국 전체 보다 더 큰 면적의 해당 주(州)의 수장(首長)인 미국 주지사들은 막강한 인사·재정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중앙 정치무대에서도 실질적인 파워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빌 클린턴(아칸소주), 로널드 레이건(캘리포니아주), 지미 카터(조지아주) 등은 주지사를 거쳐 백악관으로 직행해 미국 대통령이 됐다.
◇"정몽구 회장 한번만 만나 주세요!"…미국 주지사들의 한국行 러쉬
가장 최근에 정몽구 회장을 만난 미국 주지사는 이달 21일 서울에서 면담한 네이선 딜 조지아주 주지사이다. 그는 조지아주와 현대차가 케이시 케이글 조지아주 부지사와 기아차 조지아공장의 랜디 잭슨 인사담당 부사장 라인 등을 통해 협의해온 사안을 최종 마무리하기 위해 방한했다.
마무리할 의제(議題)는 조지아주에 현대차의 부품계열사인 현대다이모스 신규 공장 건설 건이었다. 현대다이모스는 변속기와 시트 등을 생산하는 부품회사이다.
케이글 부지사는 잭슨 부사장에게 “(조지아주는 기아차의) 친구이자 파트너가 될 것”이라며 “공장 인근의 도로망을 개선하고 다이모스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을 수송하는 철도건설 등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이런 적극적인 지원 정책에다 주지사의 직접 방한이란 ‘성의’까지 가세한 덕분인지, 정몽구 회장은 22일 조지아주에 공장 결정 방침을 굳히고 23일 이를 공식 보도자료로 발표했다. 현대다이모스가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시에 최대 3500만달러(약 400억원)를 투자해 2년 내 부품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지 신규 고용 규모는 350명 수준으로 전해졌다.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시에는 2009년 기아차가 완공한 연간 생산량 30만대 규모의 완성차 공장이 현재 가동 중이다.
이 소식이 외신으로 타전되자, 로버트 벤틀리 앨라배마주 주지사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조지아주와 인접한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시(市)에는 2005년 연간 30만대 생산 규모의 현대차 미국 생산공장 거점이 있는데, 현대·기아차의 추가 생산시설 유치 경합 레이스에서 조지아주에 밀렸기 때문이다. 자칫 현대차의 미국 제3공장이 조지아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겹친 것이다.
급기야 벤틀리 앨라배마 주지사는 현대차 채널을 통해 조만간 한국 방문 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선 현지 공장 증설 요구 봇물…국내선 연례 노조파업으로 손실 늘어, 정몽구 회장의 선택은?
주목되는 것은 현대차 노동조합의 파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해외에서 공장 신·증설 및 신규 고용 창출을 겨냥한 러브콜이 정몽구 회장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 전체 생산량의 19.2%에 그쳤던 현대·기아차의 해외 생산 비중은 이미 올 상반기 54.3%까지 뛰어올랐다. 즉, 현대차 전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현대차의 국내 주력 생산기지인 울산공장의 시간당 생산성(HPV)은 미국 현지 공장들보다 훨씬 떨어져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최근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노조의 요구는 그룹 경영진의 인내심을 넘어선 수준”이라며 “국내 생산보다 해외 생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제3공장 건설 방안이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이유이다.
현대차의 해외 공장 증설이 계속될 경우, 국내 일자리는 더 감소하고 해외에서만 새 일자리가 생길 전망이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앨라배마 공장에서 3300명, 조지아 공장에서 3000명 등을 각각 직접 고용하고 있다. 현지에 공장을 세운 3개 계열사(현대모비스·현대파워텍·현대하이스코)와 동반진출한 29개 부품협력사에 근무하는 1만 4000여명을 포함하면 현대차그룹과 협력사들이 미국 현지에서 고용하고 있는 미국인은 2만명이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의 선택이 주목되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본다면 해외 생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만, 국내 고용 창출을 원하는 정치권 등의 목소리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노조 파업으로 인해 손실이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난다면, 정몽구 회장은 국내 보다는 해외 쪽을 손들 수 밖에 없다는 관측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