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혁 특파원

태양, 축구, 플라멩코? 스페인하면 이런 게 떠오르지만 투우(鬪牛)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타도르의 현란한 복장, 소 보다 관중을 흥분시키는 빨간 천, 600㎏짜리 소의 심장을 찌르는 ‘진실의 순간’….

스페인 사람들은 투우를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 로르카와 화가 고야는 작품 속에서 여러차례 투우를 예찬했고, 미국 작가 헤밍웨이는 투우를 “예술가가 직접 목숨을 내놓고 하는 진짜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출처=온라인 커뮤니티

◇투우의 몰락은 경제위기 때문이다?

2007년 스페인 전역에서 2500회 이상 열린 투우 경기는 올해 500회 이하로 급감했습니다. 작년과 비교해 12% 정도 감소했습니다. 바스크 자치주와 카탈루냐주(州)는 법적으로 투우를 금지했고, 발상지인 안달루시아에서도 투우장을 찾는 관객 수가 줄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투우사들은 투우장을 나와, 관광명소에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융성했던 투우가 왜 지금 종주국에서 외면받고 있는 걸까요.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5년이나 지속된 경제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투우 경기장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고, 동물권익보호단체들이 로비를 해서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스페인 대표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에서 근무하며 오랜 기간 투우를 취재한 전직 기자 빌 라이온(Lyon) 씨를 만났더니, 그는 투우가 처한 상황이 “경제위기와 무관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경제위기 때문이라면 진작에 스페인 프로축구부터 망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로축구는 40억유로(약 6조원)의 빚더미 위에서 치르는 돈 잔치로 입장료만 50~300유로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 인기가 건재하며 큰 경기는 자리가 없습니다. 투우는 입장료가 평균 10~20유로 수준이고 투우협회의 재정도 건실합니다. 투우사들이 일감이 없어서 남미로 떠난다는 보도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라이온 씨는 말했습니다.

원래 스페인에서 투우 시즌(4월~10월)이 끝나면 투우사들은 종종 오프시즌에 일거리를 찾아 남미로 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10월부터 여름인 남미에서는 그때 투우 시즌이 시작합니다. 라이온 씨는 투우 몰락의 원인을 ‘축구, 지역갈등, 동물보호단체의 로비’ 등 세 개로 꼽았습니다.

◇진짜 원인은 ‘현대’와의 충돌?

스페인에서 투우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은 축구로 대표되는 현대 스포츠입니다. 우리나라의 씨름처럼, 오랜 전통이 과학적 마케팅을 앞세운 현대 스포츠에 밀려 도태됐다는 지적입니다. 축구도 영화관도 없던 시절엔 투우가 유일한 오락거리였죠. 사람들은 후안 벨몬테 같은 용맹한 마타도르에게 열광했습니다.

지금 스페인의 젊은 세대는 투우 말고도 축구·농구·테니스 등 영국·미국에서 건너온 스포츠에 더 열광합니다. 특히 지난 20년 간 프리메라리가로 대표되는 프로축구의 인기에 투우는 완전히 밀렸습니다. 스페인 젊은이들의 우상은 후안 벨몬테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라파엘 나달로 대체됐습니다.

실제로 스페인의 30대만 해도 직접 투우장을 가본 경험이 적습니다. 마드리드 시민 루이스(31)는 “아주 어릴 때 부모님 따라가 본 이후 투우장에 가 본 적이 없다”며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축구 시즌엔 주말마다 경기장에서 사는 열혈 축구팬입니다. 최근 한 스페인 언론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30%만이 투우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젊은 층으로 갈수록 그 수치는 낮아진다고 합니다.

투우 몰락의 두 번째 원인으로 지역갈등이 꼽힙니다. 현재까지 스페인에서 투우가 금지된 지역은 카나리아제도, 바스크자치주 일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주입니다. 1991년에 투우를 금지한 카나리아제도는 원래 투우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곳이라 치더라도, 바스크와 카탈루냐에서의 퇴출은 투우의 이미지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두 지역에서 투우를 금지시킨 것은 투우 산업에 큰 타격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꺼풀 깊이 들여다보면,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둘 다 스페인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지역입니다. 이곳 정치인들은 투우가 “카스티야 중심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징”이라며 투우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위해 투우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에 속한 북(北)카탈루냐인들은 투우를 프랑스 문화와 다른 자신들만의 전통유산으로 기념하기 위해 투우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했습니다. 같은 민족이 하나의 전통을 놓고 정반대 행보를 취하는 것을 보면 투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투우의 몰락에는 국제 동물권익 보호단체들의 압박도 작용했습니다. 수십년 간 투우를 야만적 스포츠로 선전해온 것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은퇴한 투우사 파코(46) 씨는 "투우를 본 적도, 심지어 스페인 땅에 와본 적도 없는 국제단체들이 무작정 투우를 욕한다"며 "헤밍웨이나 고야 등 예술가들은 감정이 없는 냉혈한들이라 투우를 찬양했나"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투우를 위해 사육된 소는 5~6년 동안 최고의 시설을 갖춘 목장에서 최고의 사료만 먹고 자라며, 최후에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단칼에 심장이 찔리는 ‘매우 편안한 죽음’을 맞습니다. 반면 “당신이 먹는 식용 소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한두살 사이에 처참하게 도축당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닭, 돼지 등 다른 모든 고기들도 마찬가지라며 “고기를 먹는 이상 투우의 잔혹성에 대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투우사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소는 평생 종우(種牛)로 선택돼 목장에서 편안한 여생을 즐긴다고 합니다. 투우 전문가 라이온 씨는 “현대 투우 공급업자들이 싸움소의 야성을 억눌러 ‘엔터테인먼트용’ 소를 양육한 것이 재미를 반감시켰다”고 했습니다. 공격성이 강한 싸움소가 아니라, 사육사나 투우사의 통제에 잘 따르는 소를 길러낸 것이 결국 업계의 몰락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내년 4월 시즌에도 ‘투우’를 볼 수 있을까?

큰 틀에서 보면, 18세기에 널리 퍼진 투우라는 전통이 축구·지역갈등·동물권익이라는 현대적인 개념들과 부딪치면서 몰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정부는 투우를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이 또한 반발이 만만찮습니다. 스페인 국민 76%는 투우 보존에 세금을 내는데 반대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 새 세대의 관객을 확보하기 위해 혁신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투우의 부흥은 어려워 보입니다. 스페인 투우는 급격한 관중의 감소 속에 올 10월 2013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새 시즌은 내년 4월 재개합니다. 최악의 한 해를 보낸 투우협회가 내년에 어떤 타개책을 갖고 돌아올 지 기대됩니다.

참, 투우사의 칼에 쓰러진 소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투우장 안에 있는 도살장에서 곧바로 해체된 후 역시 투우장 안의 정육점에서 바로 판매됩니다. 고기 맛은 별로 훌륭하지 않다고 하네요. 싸움소로 길러진 터라 지방이 적고 근육이 많아 고기가 질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싼 값에 스튜(stew) 용으로 팔려간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