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지만 결혼 증빙 서류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저희는 같이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요?"
서울 강남 미즈메디병원 진료실에서 러시아 부부와 산부인과 의사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실랑이다.
러시아인 지코바루보브(Zykova Liubov·33세)씨도 지난해 6월 이 같은 일을 겪었다. 8년 동안 임신이 되지 않아 고생하다 한국에 와서 "임신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정작 혼인신고서가 없으면 한국 병원에서는 시술받을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우리나라 생명윤리법은 인공 시술을 받으려면 가족관계증명서나 혼인관계증명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러시아로 돌아가 혼인 신고를 하고 돌아와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았다.
러시아 등지에서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으러 오는 불임 부부가 점점 늘고 있지만, 이들 가운데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술을 못 받고 돌아가는 경우도 빈번하다. 러시아에서는 함께 살고 있지만 혼인 신고를 한 커플은 60% 정도에 불과하다.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 진출을 위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던 사회주의 문화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우즈베키스탄 등도 상황은 비슷하다. 미즈메디병원 산부인과 김광례 전문의는 "굳이 혼인 신고서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러시아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의료 현장에서는 굳이 해외 환자에게까지 혼인 증명서 제출을 요구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외국인이라도 한국 땅에서는 한국법을 따라야 하는 속지주의(屬地主義)가 원칙이지만, 비윤리적이거나 환자 안전에 문제를 일으킬 상황이 아니라면 불임 치료의 경우 속인주의(사람이 속한 국가법을 따름)를 따를 수도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지난해 의료 관광 수입은 1억달러(복지부 통계)를 돌파했다. 국내에서 불임 시술을 받는 외국인만 해도 2010년 1173명에서 2012년 2505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치료를 받는 불임 환자의 90%가 러시아와 인근 독립국가연합 출신들이다. 이 중 러시아 환자는 최근 3년 사이 5배 이상으로 늘었다(179명-〉911명).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우리나라 불임 치료 수준이 높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세승 김선욱 변호사는 "사실혼은 우리나라에서도 늘고 있어 그 관계를 입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유연한 시술 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