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푀르종이 1654년 무렵 그린 ‘주피터의 모습으로 표현된 루이 14세 초상’(부분).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1715)는 72년간 통치했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는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죽은 셈이다. '한 사람의 왕,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이라는 슬로건은 세 살배기 아이도 이해할 정도로 쉽고 간명했다. 이 슬로건으로 루이 14세는 종교전쟁 이후 분열된 프랑스 국민을 하나로 묶었다.

샤를 푀르종이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그가 11세 때 완성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루이 14세의 섭정 모후에게 반대하는 프롱드의 난 진압을 기념해 그려졌다. 정치적 혼란을 극복한 어린 왕은 당당한 제우스(주피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손에 번개를 들고, 발로는 메두사를 짓밟고 있다. 제우스의 상징인 독수리가 위압적으로 날개를 펴고 발치에 앉았다.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던 그는 제우스이자 아폴론이었고, 프랑스의 단 하나밖에 없는 태양이었다. 모든 것은 왕권강화의 신화로 흘러 들어갔다. 태양을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지동설은 천문학을 넘어 군주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여겨져 환영받았다. 천계의 중심, 태양은 바로 루이 14세여야 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루이 14세는 삶 전체를 정교한 의식으로 만들었다. 아침 8시, 침실 접견에서 왕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나 말쑥하게 단장했다. 이때 신하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부의 기술'이었다. 신하들은 왕이 아폴론보다 아름답고, 헤라클레스보다 용맹스러워 보인다는 칭송을 쏟아냈다. 왕이 곧 싫증 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요란한 의전을 행했다.

태양왕의 거처인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을 모든 유럽 제후들이 선망했다. 모두 루이 14세의 취향을 따라 하고자 했다. 루이 14세가 가장 사랑한 색은 그 이름도 요상한 '벼룩색'이었다. 이 색은 다시 '늙은 벼룩' '벼룩의 등' '벼룩의 허벅지' 등으로 세분되었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구분한다는 말인가? 그건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취향의 계급학'은 열등감을 부추겨 복종심을 강화했다. 진입장벽이 높을수록, 등급이 세분될수록,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태양 주변을 얼쩡거리는 '행성'이 되는 법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은 씻지 않았다. 악취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릴 수밖에 없는 추한 사치였다. 국익보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치른 전쟁 비용도 엄청났다. 이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쓰레기와 잡초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들. 성직자와 귀족은 면세 특권으로 혜택만 누렸다. 만성화되는 재정적자를 루이 14세는 그럭저럭 버텨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노회한 왕은 후손들을 위해 이런 말을 남겼다.

"네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총애하지 말아라. 그 대신 네 눈 밖에 날 것도 감수하면서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가까이하여라.(…) 결정하기 전에 먼저 가능한 한 많이 듣도록 하여라.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언제나 힘닿는 대로 노력하여라."

다행히 이런 노력으로 그는 콜베르 같은 유능한 관료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경청과 인재 발굴이 바로 다른 별들을 계속 '태양왕' 주위에서 돌게 했던 인력(引力)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연책에 불과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를 후손들에게 남겼다. 후손들은 그의 충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결국 국민으로부터 대출해 쓴 비용은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