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리 청사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엄태정의 조각 ‘통일 1997’

독일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 시각)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회담을 한 총리 청사 1층 로비에는 특별한 조각상이 전시돼 있다. 구리 판재와 황동 덩어리로 만들어진 '통일 1997'(Wiedervereinigung 1997·120×189×79㎝)이란 작품으로, 조각가 엄태정(嚴泰丁·76) 서울대 명예교수(예술원 회원)가 만든 것이다. 독일 총리실이 2002년 구입한 것으로, 총리실이 보유한 유일한 한국 작품이다. 통일은 한·독 정상회담의 중요 의제 중 하나였다. 엄태정은 "두 개의 벽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형태로, 두 개의 장벽을 허물어 하나로 통일을 이루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독일 총리실이 구입할 당시 외국 작품은 저와 스페인 조각가 에두아르도 칠리다 두 사람 작품뿐이었다"고 했다.

해방 후 한국에서 공부한 추상 조각 1세대의 대표 작가인 엄태정은 지난 50여년 동안 장인(匠人) 정신으로 철·구리·알루미늄 등 금속 조각에만 매달려왔다.

엄태정은 유명한 야외 조각을 많이 만든 작가로도 꼽힌다. 특히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법과 정의의 상'(1995)은 법의 상징성을 건축 언어로 잘 표현한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법원 중앙정원에 서 있는 이 작품은 2011년 실시한 미술품 감정 결과, 정부가 구입한 미술품 중 최고가인 4억10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커다란 두 개의 원을 십자(十字)로 교차시킨 모양이다. 엄태정은 "외곽 원은 수직 상승 구도를 통해 법의 엄격성과 존엄성을 나타내고, 내부 반원의 수평 구조는 법의 형평성과 보호를 상징한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50주년 기념 조각인 '겨레와 함께 미래로의 상'(1998)과 아셈(ASEM) 센터 앞 '화합'(2000)을 비롯해 서울 잠실 올림픽경기장과 증권감독원 조각 등 눈에 익은 공공 조각품이 그의 작품이다.

지난 8일 경기도 화성 작업장에 만난 엄태정은 “현실은 늘 불만스럽고 우울하지만 예술 작업 속의 삶은 환상적이고 자유롭다. 당장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꿈꾸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 8일 경기도 화성에 있는 엄태정의 작업장을 찾았을 때 금속 작업에 이력이 난 투박하고 거친 스타일의 조각가를 만날 줄 알았다. 하지만 커다란 쇳덩어리가 굴러다니는 작업장에서 가냘픈 몸매에 선비 같은 풍모를 지닌 백발 신사가 걸어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농기구를 제작·판매했던 아버지는 기계를 수리하는 데 능숙했다. 탈곡기 등을 만드는 공장에서 각종 철과 기계들을 자주 접했고, 자연스럽게 금속과 친숙해졌다. 어렸을 적 철사를 가지고 놀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50년 가까이 용접만 했다."

230여㎡(70여평) 규모의 작업실은 영락없이 철공장 같았다. 2~3t의 쇳덩이는 거뜬히 들어 올리는 호이스트를 비롯, 철(약 1535도)과 구리(약 1085도)를 용접하기 위한 용접기와 산소통, 금속을 자르고 굽히고 두드리고 붙이는 각종 용구, 구리를 부식시켜 표면 처리하는 화학약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소품(小品)은 한 달, 웬만한 작품은 6개월 이상 매달린다"고 했다.

엄태정은 1967년 16회 국전(國展)에서 철 용접 기법으로 만든 '절규'가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 조각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주의풍이 대세였던 당시 국전에서 추상 작품으로 총리상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대학 시절 김종영·장우성 2인전을 보러 갔다가 '전설'이라는 철을 재료로 한 추상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고 추상 조각에 눈을 떴다. 또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마니아 조각가 브랑쿠시의 단순 간결한 추상 작품에 감동해 평생 조각을 하리라 결심했다. 미 8군 도서관을 뒤지고 명동 뒷골목에서 일본 잡지를 뒤적이며 자료를 모았다."

조각에 대한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시절 등·하굣길에 창고를 개조한 조각가 김경승 선생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인물상을 만들고 있었다. 진흙으로 인물 모양을 만들고 석고로 떠서 구리 조각을 만드는 과정이 신기했다. 학교가 끝난 후 한 달 동안 진흙을 다지고 인물상을 만드는 작업을 도왔다. 선생이 한 '이런 일에 관심이 많으면 미대에 가면 된다'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대학 시절 은사인 조각가 김세중(金世中) 교수의 조교로 일한 그는 김 교수의 추천으로 모교 교수가 됐다. "김세중 선생은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상을 평창동 집에서 만들었는데, 그때 일을 거든 적이 있다. 동상 높이가 지붕을 뚫고 올라갈 정도가 되자 땅을 파서 간신히 동상 높이를 맞추기도 했다."

그가 평생 금속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금속은 처음에는 차고 딱딱해 보이지만, 금속 자체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작업 도중 '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라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언급했듯, 금속은 한곳에 충격을 주면 전체로 울림이 퍼지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세포 같다."

오는 17일부터 7월 27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예술원 개원 60년전(展)-어제와 오늘'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